교계 선교

[신앙유산 발자취]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헐버트 선교사

한국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개신교 선교회는
미국의 북장로회와 미감리회였다.

그중에서 북장로회는 중국에 있던 알렌을 의료선교사로 임명하여
1884년 9월에 입국하도록 하였다.

▲헐버트 선교사

구한말 조선 정부는 ‘조. 미통상조약’(1882년)이 체결된 이후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 정부에 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 공사 푸트의 주선으로 미국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벙커, ( BunKer, Dalziel A,) 길모어(G. W. Gilmore),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등 3명의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들은 엘러스,길모어 부인등 두 여성과 함께 1886년 5월 북장로회 소속 교육선교사 자격으로 파송되어 1886년 7월 4일 내한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재정 형편상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면서 교사들에 대한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1891년 12월 헐버트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1893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감리교선교회가 한성에 세운 삼문출판사의 2대 사장으로 선임되어 미 감리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했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서재필을 도와 <독립신문>(1896.4.7 창간)의 탄생에 깊게 관여하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고 고종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해 벙커, 게일, 언더우드, 애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황제를 호위하면서 왕의 신변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하였다.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한국 YMCA)”창설 준비위원장이던 헐버트는 1903년 한국 YMCA 초대 회장에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YMCA를 통해 한국 상류층 청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키며,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 근대체육의 아버지 필립 L. 질레트 선교사

▲질레트선교사

우리는 여기서 한국 근대체육의 아버지, 한국 YMCA 초대총무 필립 L. 질레트 (1872-1838) 선교사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질레트는 축구, 농구, 배구, 야구, 육상, 체조, 등 서양 스포츠를 도입하여 최초로 우리나라에 보급하였다, 조선을 끔찍이 사랑했던 그는 이름도 길례태(吉禮泰)로 바꾸고 사람들 앞에서 “한국에 뼈를 묻겠다”라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었다.

그가 배재학당의 기독학생회를 학생 YMCA로 개편하고,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 민족운동가들을 영입하는 등 왕성하게 YMCA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1913년 6월 일제에 의해서 강제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중국의 남경, 북경, 상해에 머물면서 외국인교회 목사로 사역하며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 재정지원도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그리워하던 조선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38년 11월 26일 심장마비로 66세에 미국에서 별세했다.

한편, 1905년에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와 차례로 ‘가쓰라-태프트밀약’(7월), ‘영일동맹’(8월), ‘포츠머드조약’(9월) 등을 맺으면서 한국병합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10월 중순 한국정부는 헐버트 선교사를 특사로 임명하여 고종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비슨의 노력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헐버트 선교사-1949년 내한때 모습

1906년 6월 다시 한국에 온 헐버트는 고종황제와 한국 YMCA 회원들에게 덴마크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특사위임장을 받아 1907년 6월에 열리게 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되어 헤이그에 직접 가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들의 활동을 적극 도왔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 이 분통함을 억제하지 못한 이준(순국열사殉國烈士)은 할복자결로 세계만방에 호소하였다.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병합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한 헐버트는 일제의 눈총을 받으며 그들의 수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908년 한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추방 후에도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목사로 활동하면서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상원에 진술서를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면밀하게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해외의 조선유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3·1운동 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조선독립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헐버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변함이 없었으며 그는 오직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적극 힘썼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그를 초청했다. 일제의 추방으로 한국을 떠난 지 42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1949년 7월 29일, 86세의 노인이 된 헐버트가 한국으로 오던 당시 미국 AP통신 기자가 한국에 다시 찾아온 데 대하여 감회를 묻자 가슴에 품고 있던 대로 그는 대답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헐버트 선교사의 묘

그러나 그는 돌아온 지 일주일 만인 8월 5일 그렇게 사랑하던 한국 땅에서,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임했다. 대한민국은 국장에 버금가는 사회장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그의 소원대로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쓰기로 약속했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을 타계 후 50년 만인 1999년 8월 5일, 비로소 김대중 대통령이 친필로 “헐버트의 묘”라는 묘비명을 썼다.

헐버트는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는 선교사였다. 일생을 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는 한편 일제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미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통해 눈물로 한국과 한국인들의 억울한 사정을 대변해 주었다. 이처럼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오늘날 우리가 이어가야 할 것이다. 한국을 한국인 보다 더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의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이 한 마디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 이성모 목사 / 한북기독교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