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향기있는 만남

[향기있는 만남] ‘평생찬양’ 이평찬 목사’, 기독교계의 송해’ 되고 싶어

‘찬양사역자’, ‘기독교방송 진행자’, ‘목사’ 등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많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는 늘 “‘평생 찬양’ 이평찬입니다!”라고 말한다는 그는 세 가지 사역 중에서 ‘담임목사’가 제일 어렵다고 말했다. 방송은 천직이다. “저는 방송이 너무 좋습니다. 90세가 넘은 송해 선생님처럼 저도 ‘기독교계의 송해’가 되어 오랫동안 교회를 탐방하고 방송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몸은 너무 피곤해도 방송이 좋으니까 즐겁습니다.”

 ‘7080 시절’ 인기곡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그룹 ‘라스트 포인트’)의 리드싱어에서 지금은 찬양사역자로, 기독방송인으로, 목사로 국내외를 종횡무진 누비는 60세의 사나이는 지금 또 한 번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넘치는 재능과 끼로 순조롭게 가수, 기독방송인으로도 이름을 알린 줄 알았더니 타고난 재능에다 철저한 노력형 사역자로 날마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매일 새벽 3시면 눈을 떠 새벽 5시 목회하는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로 하루를 시작하고, 최상의 찬양과 진행을 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연습하며 녹음한 것을 직접 점검하는 이평찬 목사(60)는 요즘 “방송사역에 부흥회, 헌신예배, 찬양집회 사역 등으로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말했다.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말투 속엔 진중함이 묻어났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선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혈기가 왕성했던 20대, 세상 욕심을 좇아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때 했던 실수를 털어놓을 때도 꾸밈없는 솔직함과 진솔함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어느 겨울날, 빡빡한 스케줄로 바쁜 그를 잠시 멈춰 세우고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된 남다른 사연

1960년 농촌 마을인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에서 ‘면장집’ 6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이평찬 목사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남다른 가족 사연이 있다. 고을 원님을 지낸 증조할아버지에 이어 면장을 지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고, 늦둥이로 생긴 막내아들을 부모는 뱃속에서 떼어내려고 약을 먹었다고 한다. “인간의 계획은 (아이를) 없애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저는 핏덩어리로 세상에 났습니다.” 뱃속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여린 생명이 살아서 태어나자, 이제 어머니는 행여나 아이가 진짜로 죽어버릴까 걱정되어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품에 안겨 교회로 나가게 되었다는 그는 몸이 약해서 부모님의 걱정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어릴 때부터 재능과 끼가 넘쳐 주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났다. 당시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교회에서 그는 찬양, 성극, 동화구연도 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기타도 치면서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지금도 몸집이 작지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노래도 잘하고 웅변도 잘하고 목소리로 하는 일은 어릴 적부터 다 잘했습니다.”

▲ 2006년 목사안수를 받던 당시(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평찬 목사). 이 목사의 좌측은 ‘눈동자’ ‘아득히 먼 곳’을 부른 이승재 목사, 우측은 캄보디아 시소폰대학 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옥 목사

이평찬 목사와 형제들의 타고난 목소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지금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이 된 6남 1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울려 퍼진다고 말했다. 그의 형들은 공부를 잘해서 명문고로 진학했고, 이 목사도 시험을 쳐서 수원수성고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동문 중에는 전 수원시장, 국회의원 등 사회 각층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고등학생 이평찬에게는 공부보다는 기타와 음악이 더 좋았다. 타 학교의 문학의 밤 등에 자주 초청되는 인근 지역에서 유명한 학생이었고, 그의 자취방은 친구들이 쉴새 없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도 웅변대회에마다 출전해 최규하 국무총리 배 전국남녀웅변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는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아나갔다.

순전히 좋아서, 즐기면서 하던 ‘외부활동’이 많아질수록 성적은 반비례했다지만,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등학생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이후 홍익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1학년 때인 1979년, 제2회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그룹사운드 ‘라스트 포인트’로 출전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김소월 시, 원용성 작곡)로 대상을 타고 가수로 데뷔했다. 본격적으로 방송에 출연하고 공연을 다니면서 자연히 명예와 돈도 따라왔다. 군에 입대했을 때에도 ‘가수’인 그는 가발을 쓰고 공연을 다니는 기회가 많았다. 제대한 후에도 공연을 다니면서 밤무대 행사도 마다하지 않고 갔다.

‘찬양사역자’ 이평찬으로 거듭나

세상에서 가수로서 잘나가는 그를 위해 70대인 어머니는 날마다 교회에서 새벽제단을 쌓았다. 스케줄이 바빠지면서 주일도 못 지키고 손님이 따라주는 술도 먹으면서 점점 교회와는 멀어지는 그에게 어머니는 “세상 무대에서 노래하지 말고, 주님을 찬양할 것”을 자꾸 권했다. 복음찬양가수도 드문 그 시절, 25세 때부터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그는 30세인 1990년에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당시 첫 직장으로 63빌딩 ㈜대생기업에서 일한 그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밤에는 밤무대 공연을 다녔다. 밤마다 노래하며 직장 월급의 2배 이상 벌었고, 모은 돈으로 28세 때 사업을 차렸지만 2년 만에 완전히 바닥을 쳤다.결국엔 이전의 삶은 청산하고 직장과 교회 생활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어머니와 아내의 끊이지 않은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후 이 목사는 직장과 교회에서 찬양선교대회를 만들고, 교회 찬양단 솔리스트 등으로 헌신하며 이름이 알려져 교회, 기도원, 방송 출연 요청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995년부터는 찬양사역과 방송사역에 매진하게 됐다. ‘찬양사역자’ 이평찬으로 거듭나는 시기였다.

기독교방송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극동방송의 출연 요청을 계기로 이후 토요일마다 방영하는 교회탐방 프로그램 ‘우리교회 좋은교회’에서 7년 최장수 MC로 뛰게 되었고, 교계에 얼굴이 알려지면서 전국을 넘어서 전 세계로 집회를 다니게 되었다. 이후 CTS기독교TV에서 진행자로 활약했고, 사역을 하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백석대 실천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병행하여 2006년 6월 6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5년 만인 2011년 우리교회 좋은교회의 이규영 원로목사가 은퇴하면서 담임목사로 취임해 목회를 시작했다.

2016년 1월부터는 굿티비(GOODTV)의 미니스트리본부 본부장으로 옮겨 사역하고 있다. 전국 교회를 탐방하며 목회자, 성도와 교회를 탐방하며 목회자, 성도와 교회의 자랑거리 등을 소개하는 ‘미션 X파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교회 홍보영상을 제작, 지원하고 있으며,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방송으로 기도해주는 ‘능력의 기도’ 프로그램의 진행자 섭외 및 전국 순회집회 등도 하고 있다. 매년 300~500명과 영국을 방문, 영국교회의 현실을 보고 한국과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능력의 기도자로 회복시키는 ‘영국기도선교대’를 모집하며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주말에도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교회 건물은 박물관, 술집, 이슬람사원 등으로 팔리는 영국교회를 보고 와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고, 예배 회복을 꿈꾸는 영국기도선교대 프로그램은 이미 2017년 6월 17일부터 7월 6일까지 일정에 250여 명(300명 모집)이 신청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 현지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비용이 저렴했다고 한다.

GOODTV 미니스트리본부는 글로벌청소년나눔운동 GYN과 함께 아프리카 염소은행 설립 사역도 진행하고 있다. 16년에는 우간다, 르완다를 방문해 선교사들이 소개해 준 크리스천 빈곤가정들에 어린 암염소를 선물해 주었다. 염소 한 마리는 빈곤 가정의 경제를 살리고 자녀 교육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또 다른 크리스천 가정에 분양도 가능하게 했다. 우간다, 르완다에는 지금까지 총 450여 마리의 염소를 심었다. 다음은 이평찬 목사와의 일문일답 내용.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또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으신 때는 언제였나요.

“군대에서 병장 때 최전방인 경기도 연천 백학에서 근무했습니다. 주일마다 제가 소대에서 찬양하고 메시지도 전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뜨거워졌습니다. 하루는 산기도를 하러 들어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제대한 후에는 다 잊어버렸지요. 한참 지나 지금 섬기고 있는 우리교회 좋은교회에 방문했을 때 당시 담임목사이던 이규영 목사님께서 저를 딱 보더니 ‘서원하셨죠?’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목사님 교회에서 담임목회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체험한 것이지요.”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가장 큰 시련은 언제 겪으셨습니까.

“세상을 포기할 때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계속 기도하셨지만, 사실 노래하는 사람이니 ‘스타’가 되고 싶었고, 젊은 나이에 밤무대로 수입도 많았으니 정말 성공하고 싶었죠. 사실 제가 사업체를 하나 차렸습니다. 다니던 밤무대를 인수해서 직접 운영한 거예요. 28세 때 사장이 됐는데 완전히 쫄딱 망했습니다. 그동안 벌어놓았던 돈이 다 날아갔습니다. 세상 돈에 더 큰 욕심을 내다가 2년 만에 다 털려서 완전히 바닥까지 갔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기도가, 그리고 아내의 기도가 저를 변화시켰어요. 더 이상 세상 노래, 세상 돈에 욕심내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순탄하게 바로 교계로 넘어온 게 아니라, 그동안 모았던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이쪽(세상)은 쳐다도 안 보겠다’며 오산리기도원에서 기도하며 찬양사역을 시작한 거예요. 밤마다 노래하던 것을 그만두니 나중엔 직장도 그만두고 온전히 사역자로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그때의 실패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그래도 어릴 적 신앙의 심지가 있었던지, 순순히 ‘내가 갈 길이 이게 아니구나’라고 깨닫고 주님을 찬양하며 세상 욕심을 내려놓았죠.”

-주님을 믿기 때문에 경험하신 환란과 핍박은 없었습니까.

“신앙 생활을 꾸준히 해왔는데 특별히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크리스천으로서 세상 욕심을 냈던 게 제게는 오히려 불이익이었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갔어야 했는데, 술집을 차렸으니 하나님 입장에서는 분노하실 일이었죠. 쫄딱 망하고 크리스천인 줄 아는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창피와 조롱도 당했어요. 아예 그들과 같은 편이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크리스천으로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사람들이 속으로 더 조롱했을 것이고…. 제 양심에도 어긋난 행동이었죠. 그리고 그 일이 잘됐으면 제가 지금 이 세상에 있었을까 싶어요.”

-21년째 찬양사역자로 사역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신 때는 언제였나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간순간 너무 감사한데, ‘찬양치유집회’로 여니까 많은 분이 영육간 치유되고 관계성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고 더욱 기쁩니다. 한번은 2006년 목회 안수를 받자마자 필라델피아의 한 한인교회에서 부흥회 인도 요청이 들어왔었습니다. 집회 전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거의 용에 가까운 큰 구렁이가 교회에서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하며 딱 잡았더니 먼지처럼 사라져버렸어요. 2박 3일간 찬양치유집회를 하는 마지막 날, 저를 안내한 한 집사님이 ‘사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대립이 있어 목사님이 쫓겨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찬양치유집회를 하면서 모두가 회개하고 다 회복됐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교회가 화목하게 잘 성장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보람이 있었습니다.”

-찬양사역을 하기 때문에 컨디션 관리가 중요한데, 평소 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찬양을 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악가한테 개인지도도 받습니다. 특히 요즘은 프로추어시대라고 하잖아요. 프로도 노력 안 하면 금방 아마추어가 되니 시대이니,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쨌든 앞에 서서 이끌어가는 리더가 되고 프로페셔널한 사역자가 되려면 남과 같아서는 안 되니, 계속 자기 개발을 하고 훌륭한 분이 있으면 찾아가서 배웁니다. 연세대 성악 최고위과정에서도 배우고 호흡, 발성 등 내가 할 수 있는 한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건강해야 노래도 잘하니까 시간 되면 헬스장에 가서 헬스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새벽기도를 무조건 드립니다. 새벽기도를 인도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지만, 저 또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또 집회 전에 신경을 쓰는 것은 핸드폰으로 멘트와 찬양을 여러 번 녹음해서점검하는 것입니다. 항상 부르는 찬양이라도 연습을 안 하면 음이 떨어지고 내 습성대로 불러서 듣는 분들에게도, 저 스스로에게도 은혜가 안 될 수 있어요. 목소리 크기와 톤도 조절하고 연습 횟수와 관계없이 최상의 것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계속 점검합니다. 집회가 오후 3시에 있으면, 아침부터 출근길 차 안에서도 연습하고 점검하는데 그러다 보면 ‘이렇게 해야겠다’는 감이 옵니다. 여자가 거울을 안 보고 다니면 흉해 보일 수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기를 계속 점검하고 개발해서 프로페셔널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하니까 저도 나이가 먹어도 소리가 뒤처지지 않게 나온다는 말을 듣습니다.”

-방송사역에서 느끼시는 보람과 어려움이 있나요.

방송을 통해 교회를 살리고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이 너무 기쁘고 보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방송이 무료로만 되지 않고 제작비가 들어가고 후원이 필요해서 교회에 부담을 줄 때 미안하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최소의 경비로 해주려고 애를 쓰는데, 이것은 늘 부딪히는 일상의 짐이죠.”

-직접 목회하고, 또 전국의 목회 현장을 탐방하면서 최근 피부로 느끼시는 한국교회 상황은 어떤가요.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 교회가 침체되는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특별 찬양집회, 교회 부흥회, 방송 촬영을 해도 감동이 적고 다들 바빠서 그런지 사모함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참여를 잘 안 하니 교회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되고 악순환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예를 들어 주일 오후에 교회탐방 방송을 촬영할 때 옛날에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남아있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출연자만 남고…. 교회 예배가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맞춰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어 침체된 유럽국가들을 답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교회를 다녀보면 여전히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열심히 일하는 목회자분들이 있어서 우리나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방송으로 더 많이 알리고 싶고, 하나님께서도 한국교회가 쓰러지지 않고 세계적인 선교국가가 되도록 세워가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전도가 어려운 한국교회를 위해 ‘추수전도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난 24년간 수많은 교회를 다니며 전도법의 특징을 보고, 그중에서 발견하여 우리 교회에 도입한 전도법인데 반응이 좋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겉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많이 곤고합니다. 담임목회자부터 나가서 무작위로 “혹시 교회 다니세요”라고 노방전도를 하면, 반은 긍정적인 반응이 옵니다. 그중 또 절반은 영접기도를 받습니다. 이후 계속 그와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며 후속관리하여 교회로 나오게 합니다. 그렇게 한 시간 전도하면 10명은 교회에 오거나 영접하는데, 요즘 제가 다른 교회에 초청받아 나가면 직접 목회자, 장로, 성도들과 노방전도를 나가 시범을 보여줍니다. ‘익은 곡식 거둘 자가 없는 이때에, 누가 가서 거둘까’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가서 전하니까 전도가 되는 때입니다. 저는 이 추수전도법이 전국 교회로 확산되면 좋겠습니다.”

-다음세대와 신앙의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명제이니 어른들뿐 아니라, 유아나 초·중·고등학생 모두 이 단순한 명제 아래 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세상의 유익과 출세, 명예도 있지만, 정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명제를 다음세대에 분명하게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세상적 조건이나 유익을 바라고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교회도 복음이 아닌 다른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면, 세상이 주는 것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세상 프로그램을 자꾸 도입하거나 세상의 것과 견주지 말고,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이라는 등 아주 근본적인 신앙과 말씀을 가르치고 깨우쳐주어 다음세대가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찬양사역자’, ‘기독교방송 진행자’, ‘목사’ 등 다방면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앞으로의 꿈이 무엇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는 늘 “‘평생 찬양’ 이평찬입니다!”라고 말한다는 그는 세 가지 사역 중에서 ‘담임목사’가 제일 어렵다고 말했다. 방송은 천직이다. “저는 방송이 너무 좋습니다. 90세가 넘은 송해 선생님처럼 저도 ‘기독교계의 송해’가 되어 오랫동안 교회를 탐방하고 방송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몸은 너무 피곤해도 방송이 좋으니까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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