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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성공확률 5000:1, 인천상륙작전

9월 12일 (80일 째 / D-3)
인천상륙군 부산 출항

* 미 제1군단 새로 편성: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사단.국군 제1사단
* 낙동강 전선 방어작전 계속

仁川上陸作戰 : 韓美 海軍, 海兵隊

한국전쟁 기간 중 해군은 크고 작은 여러 차례의 작전을 수행했지만,
인천상륙작전만큼 극적이고 통쾌한 순간은 없었다.
한국 해군 단독으로 치른 대한해협 해전(PC-701함 대첩)과는 달리 이 작전은
UN군 연합작전의 일환이었다.
우리 해군과 해병대에 큰 경험과 교훈을 남겨 준 작전이었다는 점에서길이 역사에 남을 일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적에게 빼앗긴 수도 서울을 3개월 만에 탈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고 수세에 몰린 전쟁을 공세로 전환시킨 전략적인 쾌거였으며,
한국의 명운(命運)을 구원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누구나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인천(仁川)을 선택해
보기 좋게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걸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전으로 10만 명을 구했다는 것은 부산 교두보에서 반격을 개시해
북괴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려면 적어도 10만 명의 피해를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었고,
상륙 작전 부대의 명칭은 ‘제7 합동기동부대’였다.
스트러블 7함대사령관(해군중장)이 사령관으로 겸직 발령이 났다.

▲스트러블 제독,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Admiral Arthur Dewey Struble, US Navy )28 June 1894 – 1 May 1983
▲스미스 미 해병 제1사단장(소장)과 도일 공격부대 사령관(해군소장)

上陸作戰部隊 構成 

* 공격(攻擊) 부대 : 도일 미 해군소장
* 상륙(上陸) 부대 : 알몬드 육군소장
(상륙 부대 지휘관 발령은 이렇게 났지만 주력 부대가 미 해병대여서
실질적으로는 스미스 해병대1사단장이 지휘)
* 봉쇄(封鎖)와 호송(護送) 부대 : 앤드류스 영국 해군소장,
* 초계(哨戒)와 정찰(情察) 부대 : 헨드슨 미 해군소장,
* 고속 항공모함(高速 航空母艦) 부대 : 어윈 미 해군소장,
* 군수지원(軍需支援) 부대 : 오스틴 미 해군대령
* 동원 함정은 8개국 261척, 동원 병력은 7만 명이었다.

스트러블 제독의 작전 계획 개요:
9월 15일 첫 만조 시간인 아침 6시 30분 미 해병대 1개 대대가 투입되는 월미도 상륙으로 시작.
월미도 상륙 후 인천 지역 교두보 확보를 위해 두 번째 만조 시간인 오후 5시에
해병1사단을 투입하고 해안두보를 신속히 확장시켜 김포비행장과 서울을 점령하며
화력 지원은 순양함과 구축함이, 근접 항공 지원은 항공모함 함재기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짜여졌다.

▲알몬드 육군 소장 / 상륙부대 사령관,후에 제10군단장
▲인천상륙작전에 특별 선발된 육군 제17연대 또다른 장병들, 승함 대기 중(부산, 1950. 9. 12)
▲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해군함정에 승함하고 있는 미 해병대 병사들( 부산, 1950.9.12)

함명수 정보참모부장(후, 해군참모총장)의 당시
해군 첩보작전 일화(옮김)


모든 임무가 끝나자 13일 영흥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무사히 작전을 마친 것은 모두가 주민들의 협조 덕분이었다.
아쉬운 작별을 고한 뒤 대원들의 상륙작전 참가를 위해 인천 근해에 와 있는
해군함정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잔무 처리를 위해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병조 등 일부 대원을 남겨 두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수백 척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를 가득 메우다시피 했고
우리 해군 포함이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으니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했다.
그러나 허를 찔리고 말았다.

우리가 철수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인민군 중대 병력이 14일 0시
대부도와 선재도를 통해 섬으로 들어와 우리 첩보대 잔여 병력과 해군 의용대를
기습해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임 소위와 홍병조가 전사하고 많은 주민이 죽거나 다쳤다.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임 소위가
중대장이 돼 잔여 병력과 해군 의용대를 지휘, 방어전에 임했다.
그러나 정규군에 대항할 무기를 갖추지 못한 의용대는
인민군의 대적이 되지 못했다. 쫓기고 쫓겨 다다른 곳이 십리포 야산.
더 이상 퇴로가 없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판단한 홍병조는 도망치지 않고 숲에 숨어 있다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적병 6명을 M-1 소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을 남겨 자신의 가슴에 대고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임 소위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왼팔을 접어 권총을 지지해 놓고 적병 셋을 쏜 뒤
자신의 이마에 대고 나머지 한 발을 발사했다.

상륙작전이 끝난 뒤 나는 영흥도 십리포 해변에 전 첩보대원을 소집해
임 소위와 홍병조를 화장하고 간소한 영결식을 거행했다.
“이제 그만들 우시지요.”전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슬퍼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느 노인의 말에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인천항이 잘 바라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두 전우의 유해를 매장하고 섬을 떠났다.

그 뒤 정부는 그들에게 각각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고,
미국 정부도 은성 무공훈장을 추서했다.고인들의 유해는 1960년대 초 국립묘지에 이장됐다.

(임병래 중위 19묘역 5판 063호, 홍시욱 하사 21묘역 1448호)
문화방송이 1980년 10월1일부터 45일간 방송한 ‘한국전쟁 비화’ 제1편
‘인천상륙작전 17인의 결사대’ 편은 바로 해군 첩보대의 작전이다.

9월 13일 (81일 째 / D-2)
仁川上陸機動艦隊 계속 航進

* 장사동(長沙洞) 상륙양동작전 (上陸陽動作戰) 감행
* 仁川상륙작전 준비단계-2, 1950년 9월
* 상륙기동함대 : 일본 출항 부대와 합류, 서해 向
* UN군 및 국군, 포항 서남방 8km 지점 진지 탈환

仁川상륙작전 준비단계-2

9월 13일 오전에 함포지원전대(미 중순양함 2척, 영 경순양함 2척,
미 구축함 7척)는 월미도(月尾島)를 포격하기 위해 인천수로에 진입하였다.
11시 45분에 구축함들이 기뢰를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간조시간이었기
때문에 기뢰들이 수면 상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구축함들은 40mm 기관포로 기뢰를 폭파하면서 수로를 통과하였다.
이날 12시 42분에 선두의 거크(Gurke)함이 제일 먼저 월미도 앞 해상 800야드에
투묘하였고 이어 다른 구축함들도 포격 위치에 투묘하였다.
순양함들은 인천 남쪽 수마일 되는 포격 위치에 투묘하였다.
13시가 되기 직전에 구축함들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몇 분 후에 월미도의 적 포대에서 반격을 가해 왔는데, 적의 사격은 주로 월미도에
가깝게 위치한 구축함 거크, 스웬슨(Swenson) 및 콜릿(Collett) 함에 집중되었다.
콜릿 함에는 75밀리 포탄 9발이 명중되었고 거크 함에는 3발이 명중되었다.
이날 전사 1명과 부상 5명의 피해가 있었다.
구축함들은 약 1시간 동안 월미도의 적진지에 5인치 포탄 1,000여 발을 발사한 후
14시에 묘지(錨地)를 이탈하였다.
순양함들은 16시 40분까지 월미도를 포격한 후 외해(外海)로 철수하였다.

▲ 순양함 세인트 폴 호(CVL-73 USS-St. Paul), 인천 외해(1950.9.14)

9월 14일 월미도에 대한 함포사격이 재개되었다.
이날도 수로에 진입할 때 발견된 기뢰는 역시 함포로 처치되었다.
이날 구축함 5척이 월미도 주변에 포진하여 12시 55분부터 14시 22분까지
함포사격을 실시하여 5인치 포탄 약 1,700발을 발사하였다.
이날 월미도 적 포대의 반격이 아주 미약하고 부정확했는데,
이는 2일간의 공격 전 포격으로 적의 포진지가 상당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국 순양함 쟈마이카 호

장사(長沙)상륙작전(1950년 9월 13일)

장사상륙작전 요도 : LST-문산호
9월 13일 부산항 출항, 14일 장사해안 도착, 좌초
북괴군과 전투 계속

▲작전 중 좌초된 LST 문산함(영덕군 장사리 해안, 1950. 9. 13)

9월 13일 경북 영덕군 장사리, LST-문산함으로, 대구 등지에서 자원입대한
‘펜 대신 총을 달라’라는 학도의용군 고등학생 772명,
지원요원 56명이 적전상륙을 감행하였다. <육본작명 174호>,
이는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는‘양동작전’목적으로써,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제대로의 군장도 갖추지 못한 학도병(學徒兵)들이 근 1주간을 악전 분투한
역사적 거사였다. 태풍으로 인한 기상악화로 선박이 좌초까지 되는 마당에,
죽기로 싸운 그들의 애국정신을 길이 빛내주어야 할 것이다.
전사 139명, 부상 92명, 행방불명 수십 명의 군번도 계급도 없는,
이 땅에 뿌려진 젊은 피의 희생된 양의 거름이다.
국가에서는 그 후 여러 조처를 했다고 하지만….

▲ 학도의용군 사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문산호는 9월 14일 새벽에 상륙지점 근처까지 도착했으나,
당시 상황은 태풍 케지아가 접근하는 여파로 인해 파고가 3~4m로
매우 심해서 풍랑이 거칠었으므로 배는 좌초되고 적의 집중사격을 받게 된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학도병들은 장사리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이고
며칠간 북괴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서 적군이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말할 정도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원래 3일간의 작전예정이 잡혀 있었으나 문산호가 좌초된 관계로
철수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하게도 9월 16일부터는 후방을 차단당한 북괴군 제5사단의 정예부대인
2개 연대 규모의 부대가 T-34 전차 4대를 앞세우고 북상하여
상륙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상륙부대는 9월 19일까지 치열한 전투끝에 간신히 상륙지점으로 되돌아와서
해군이 지원한 LST 조치원호를 타고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으며, 40여 명 정도는
적의 집중사격 등으로 인해 승선 기회를 놓치고 적의 포로가 되는 큰 손실을 기록한다.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친필로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정도로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 장사상륙작전 후 철수하는 장면 (출처=장사상륙작전 기념사업회)

9월 14일 (82일 째 / D-1)
상륙기동함대 仁川 外海 도착

* 미군, 아침 일찍 낙동강 도하. 1km 전진
* 국군, 안동 서방 8.5km 지점에서 공격 개시
* B-29, 북한지역 철도 폭격
* 팔미도(八尾島) 등대(燈臺) 작전

▲ 미 제24보병사단 병력 부교(浮橋)를 통하여 낙동강을 도하. (1950. 9. 14, 출처-주한미군 시설관리사령부 )

D – 1

▲ 인천상륙작전 기함(旗艦) 마운트 맥킨리(USS Mount Mckinley)호
맥아더 사령관이 작전을 지휘.
▲한국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왼편),
미 함선 피카웨이 호 함교에서 함장과 함께. (1950. 9. 14)
▲ 인천 외해에 집결한 상륙기동함대 모습(일부)과 코르세어 함재기
(총 261척; 미국 225, 영국 12,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네덜란드 1, 한국 15척)

팔미도(八尾島) 등대(燈臺) 작전

▲ 팔미도 등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대역사적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그마한 작전이
그 앞길을 열어 주었다.
지름 2m, 높이 7.9m의 등대 불빛 하나였으며, 한국 해군 첩보부대의
협조를 받으면서 수행한 KLO(Korea Liaison Office), 이른바 ‘팔미도등대 작전’이었다.
“등대에 불을 밝혀라 !”그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라”
상륙기동함대 사령관의 명령이다.

9월 14일 밤 KLO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한미연합 특공대가 팔미도 등대 탈환에
성공하였고, 등대 불을 밝힘으로써 261척의 함선이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 인천상륙작전 직전 팔미도에 침투해 등대의 불을 밝힌 최규봉씨와
KLO부대 대원들이 작전 성공 후 소형 보트를 타고 기함 ‘마운트 매킨리’호로
복귀하고 있다.(최규봉 대장, 사진 오른편에 작업모 쓰고 앉아있음)
▲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영흥도, 팔미도 등 주변에서 활약한
연정 해군소령 (가운데 허리에 권총)과 클라크 대위(맨 오른쪽) 팀 일행

맥아더 사령부는 특공대를 조직해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 나서기로 했다.
이 작전에는 KLO부대(Korea Liaison Officeㆍ美 극동사령부 한국 연락사무소)가
투입됐다.
KLO부대는 1948년 미국이 對北 정보수집 등을 목표로 만든 특수부대로 통상
「켈로부대」라 불렸다.
KLO는 고트, 선, 위스키 등 3개 예하부대로 구성돼 있었으며,
부대마다 1,000여 명의 요원들이 각지에서 첩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특공대는 한국인 3명과 미국인 3명 등 모두 6명으로 구성됐다.
유진 클라크 美 해군 대위, 클락 혼 美 육군 소령, 존 포스터 美 육군 중위,
桂仁珠(계인주) 육군 대령, 延禎(연정) 해군 소령, 崔奎峰(최규봉) KLO 고트隊(대) 대장 등 6명이었다.

9월 12일경,
미국 소해함 두 척이 월미도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척이 바다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한동안 무엇인가 작업을 하더니 갑자기 기관포를 바닷속으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수십m의 하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소해함에 의해 탐지된 機雷(기뢰) 세 발이 폭발한 것이었다.
보름 가까이 기뢰를 옆에 두고 수심 측정 작업을 했던 崔대장은 등줄기가 오싹했다고 했다.

9월10일, 崔대장에게 드디어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밤 소음총으로 무장한 그와 켈로대원 25명은 영흥도를 떠나
발동선을 타고 들어가 팔미도를 기습했다.
북괴군들의 저항이 완강했지만 교전 끝에 북괴군 8명 중 5명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상륙작전 개시 전까지 5일 동안 崔대장 측과 북괴군 사이에는
등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계속됐다.
팔미도 등대를 보니 무슨 연유에서인지 인민군은 이 등대를 전혀 쓰지 못하고 있었다.
조사해 보니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졌을 뿐 등대는 멀쩡하였다.
그들은 東京(도쿄) UN군 총사령부에 『필요하다면 등대를 켜 놓겠다』고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등대의 불을 켜라는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D-1, 14일 오후 7시 30분,
崔대장은 「15일 0시 40분을 기해 불을 켜라」는 최후명령에 따라 등대 탈환전에 나섰다.

6명의 대원들은 대검, 수류탄 두 발, 권총 등 경무장만 한 채 木船(목선)을 이용해 해안가에 배를 댔다.
배에서 내리는데 바닷물에 발이 빠져 「철벅철벅」하고 소리가 났다.
이날은 어찌된 일인지 북괴군들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민군 경비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60m가 채 안 되는 정상까지 기어오르다시피 올랐다.
頂上에 다다랐을까. 막사(등대지기 숙소)에서 경계를 하던 인민군으로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가 등대 뒤에 있는 벼랑 쪽으로 「휙」하고 사라졌다.
곧이어 「첨벙 첨벙」 소리가 났다.
소리로 보아 두 명의 인민군이 대원들의 기습에 놀라 바다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이때가 9월 14일 23시 30분,
등대를 점령하였으나 대원들은 등대를 점화시킬 수 없었다.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등대에 불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3시간 가량 나사못을 찾아헤매다 포기하고
기진맥진해 엎드려 있었다.
이때 등대 바닥에서 崔대장의 손에 「선뜻한」 느낌의 금속이 잡혔다.
바로 나사못이었다.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성공했고,
아군이 점령했음을 알리기 위해 등대 鐵材(철재) 난간에 星條旗(성조기)를 게양했다.

팔미도의 등대를 애타게 바라보던 연합군 함대의 눈에 불이 훤히 밝혀진 건
정해진 시각보다 1시간 40분 늦은 새벽 2시 20분.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는 등댓불과 성조기를 확인하자,
연합국 함대에게 인천 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를 신호로 7개국의 연합함대는 등대를 길잡이 삼아,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극심한 간만의 差(차) 등 여러 악조건으로 성공 확률이 거의 없다던
이 운명적 작전에 10만 병력과 대함대가 무사히 인천에 상륙할 수 있도록
팔미도 등대가 바닷길을 이끈 것이다.
등대에 환한 불을 밝혔던 한국인 켈로 부대원들과 클라크 대위 등은
작전 성공의 숨은 공로자였다.

한편, 9월 14일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 나선 6명의 대원을 제외한
영흥도 잔류 대원 20여 명은 이날 밤 11시경 대부도에 주둔하고 있던
북괴군 1개 대대의 습격을 받아 전멸당했다.

14세 소년 스파이 에디 고(Eddie Ko),
몹시 자랑스런 戰爭英雄

▲ 에디 고 씨의 강연 장면 모습

– 전선 넘나들며 미군에 정보 제공
– 맥아더 상륙작전 감행 이틀 전엔 계획 알아차린 북괴군 모두 처단
– 상부보고 막아 작전 성공 이끌어
– 목숨 걸고 등대도 밝혀 진격 도와
– 휴전 후 워싱턴에서 이 애를 보내달라 요청
– 영주권 받고 미군부대 근무하며 미국에 정착
– 요즘은 한국전쟁 관련 명강사로 활동 중, 6. 25전쟁과 한국을 알리는 데 열정 쏟아

▲ 14세 에디 고.(뒷줄 왼쪽 세 번째, 흰옷, 총 메고있는 소년)

미국 플로리다 템파시에 거주하는 에디 고(81세· 한국명 고준경) 씨.
그는 지난해 프로리다 템파 교외의 ‘참전용사 추모공원’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를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그의 부친은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여서
인민군의 요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해방 이듬해(1946년) 부친은 그의 형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 남으로 탈출했다.
반역자 가족으로 몰린 어머니와 에디 고는 이후 쫓겨 다니다 1948년에야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철원은 이북 땅이었다.
평화롭던 시절도 잠시,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
동숭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광장에서 국군 30여 명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소년은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에 들렀지만 아무도 없자 인천 영흥도가 고향인 교회 친구가 떠올라 무작정 서쪽으로 걸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될 한 사람을 만났다.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 대위였다.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맥아더가 정보 수집을 위해 영흥도로 미리 보낸 정찰대원이었다.
클라크 대위는 당시 소년들을 모아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뭍에서 온 소년을 경계했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그 됨됨이를 관찰하더니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가 큰 도움이 됐다.
주 임무는 인천항과 월미도 등지에서 인민군 동태를 관찰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전시라도 제재를 받지 않고 전선을 드나들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인 9월 13일 인천을 다녀오라는 클라크 대위의 명에 따라
친구와 함께 나섰다.
친구는 그때 “아무래도 유엔군이 인천으로 오려나 보다”고 말해
그제서야 전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도중 친구는 부모님을 뵈러 영흥도에 들렀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소년들이 미군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했다.
어디론가 끌려가더니 2시간쯤 뒤 친구는 부모와 함께 공개 처형을 당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년은 친구가 고문에 의해 상륙작전 계획을 토설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행히 그날은 물때가 맞지 않아 인민군은 보고를 위해 배를 타지 못했다.
그날 밤 소년은 인민군들이 기생집에서 술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주민 몇 명과 함께 새벽에 잠입, 상륙작전 계획을 알았을 법한 인민군들을 모두 죽였다.
(이 대목에서 에디 고 씨는 처음 이 사실을 공개한다고 했다.
만일 다음날 그 인민군들이 인천으로 떠나 상륙작전 계획을 상부에 보고했다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에디 고 씨의 설명이었다.)

클라크 대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때문에 앞서 인천의 관문인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클라크 대위와 소년 에디 고를 비롯한 정찰대는 전날 밤 작은 보트를 타고
팔미도에 내려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을 물리친 후 D데이 0시 12분에 등대를 밝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소년은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가겠다고 하자 클라크 대위는 추천장을 써 주었다.
덕분에 소년은 미 해병 제1사단의 정식 정보원이 됐다.
이후 소년은 미군과 함께 정보 수집을 위해 원산 흥남 함흥 장진호 등지를 오가다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다행히 중공군 장교는 보스턴 에서 공부한 엘리트로 영어를 잘했다.
소년은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라고 하며 동정심을 유발했다.
그 장교는 12만의 중공군이 장진호 주변에 배치돼 있고,
20만 명은 만주에 대기 중이라 미군의 승리는 어렵다고 설명한 후 소년을 풀어줬다.
미 해병대에 재합류한 이 소년은 이 사실을 보고한 후 장진호 전투 등에 참전하며
정보 수집에 매진했다.
그해 12월 흥남부두 철수 땐 피란민들의 안전 승선을 위해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돕고는 걸어서 남하했다.
휴전 때까지 그는 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휴전 후 가족과 상봉한 그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미군 전우 3명에게 편지를 썼다.
그 중 한 명이 부친에게 6. 25 때 에디 고의 활약상을 소개했고,
부친은 이를 친구인 상원의원과 워싱턴DC 정가에 전달했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에디 고를 찾아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편지가 전해졌다.
실제로 1955년 미 영사가 여권을 만들어 에디 고를 찾아와
마침내 그는 그해 6월 뉴욕에 도착했다.
이후 미 영주권을 받은 에디 고 씨는 다시 미군에 입대,
한국에서 CIC(주한미방첩대) 요원으로 1년 8개월간 근무했다.
제대 후 그는 대학에서 항공학을 전공,
항공회사에 근무하다 뉴욕에서 무역회사를 차려 제법 돈을 모았다.
한국 여인과의 결혼도 이즈음 했다.

1989년 그는 플로리다 템파로 이주해 10년 전까지 골프장 두 개를 운영했다.
2000년 부터 6. 25 참전용사들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매년 이 지역의 참전용사들을 골프장으로 초대, 라운드와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모든 사업을 정리한 그는 현재 6. 25전쟁과 한국을 알리는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지역 초중고와 로타리 등 봉사단체, 그리고 군부대 등에서 전쟁 관련 특강을 하고 있다.
“6, 7년째 관련 자료도 찾고 공부를 하다 보니 제가 생각해도 실력이 늘었어요.”
명강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올 한 해 강의 일정은 이미 지난해 말 모두 잡혔다.

템파지역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원으로,
그들을 위해 한국을 대신해 헌신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에디 고 씨는 “현지 한인들도 애쓰고 있지만 한국정부도 이제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참전용사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로페즈 미 해병 중위와 상패

플로리다 템파 교외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옆에는
85㎏의 제법 큰 둥근 돌이 기단 위에 소중히 올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인천상륙작전 때 전사했던 로페즈 중위의 기념비이다.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와 함께 방벽을 넘는 그의 뒷모습은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 사진으로 꼽히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 사진이 찍힌 직후 전사했다.
그는 후에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추서받았다.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는 에디 고 씨의 주도로 2007년 재향군인의 날,
인천 앞바다에서 공수해 온 이 돌에
‘The Green Beach Point of Incheon Landing Operation’이라는
문구를 적어 템파 인근 키스톤 에드레디스 공원 한국전쟁기념광장에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지난해 7월 27일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인 참전용사 추모공원 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제막식에 맞춰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함께 공수된 작은 돌은 에디 고 씨의 제안으로 로페즈 중위의 모교인
힐스보로고교에 기증돼, 그의 유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 개인기부와 함께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의 모금 등으로 로페츠 기념비를 세운 에디 고 씨.

당시 인천에서 직접 공수해 온 돌을 보고 참전용사회도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일부, 국제신문 이흥곤 기자 방문기사 옮김)
“We are appreciative to Americans,”said Ko,
who also served in the U.S. Army after coming to America.
“Who knew that (South Korea) would one day sell cars in America?”

 

9월 15일 (83일 째 / D – DAY)
UN軍, 인천상륙작전 개시

* 월미도 탈환 (H-Hour : 06:30)
기동함대사령관 도일(Doyle) 미 해군소장,
미 제10군단, 미 해병 제1사단, 함정 262척, 약 7만 명

▲ 인천상륙작전 전체 요도

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D-day 개요 <H-hour : 06:30>

상륙 부대의 병력은 함정 262척, 총 7만여 명에 달하였다.
주력 부대의 일부는 이미 9월 초부터 부산 근처에 집결해 있었고,
나머지는 9월 11일 제90기동함대와 함께 일본에서 출발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한국해병대는 UN 해군함대의 지원 포격을 받으며 군산· 목포·
포항· 영덕 등 동서 해안 여러 곳에서 일련의 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9월 15일 새벽 2시 함포 지원전대를 포함한 미해군 공격전대가 상륙부대의
제1진인 미 제5해병연대 3대대와 M26퍼싱전차 1개 소대를 싣고
월미도를 향해 떠나기 시작하였다.
새벽 5시 북괴군의 방어진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05시 40분,
17척의 LCVP에 상륙 선봉부대가 탑승했고 같은 시간 토레도호의 200mm포
일제 사격을 신호로 전 함대의 상륙 지원 사격이 시작됐다.
06시 15분부터는 세 척의 로켓포함이 탄막 사격을 개시,
월미도 상륙 해안 일대는 불바다가 됐다.
작전 계획상 미 해병대 5연대 3대대 병력의 월미도 해안 도착 예정 시간은 06시 30분이었다.
LCVP에서 내린 미 해병대 1제대 선발대가 실지로 해안에 도착한 시간은 06시 31분, 주력 도착 시간은 06시 33분이었다.
06시35분 제2제대가 상륙했고 10분 뒤에는 전차를 적재한 LSU가 도착, 포격과 화염방사기를 발사하면서 산 쪽으로 진격했다.
북괴군들은 산기슭의 동굴 속으로 도망쳐 수류탄을 던지며 저항을 기도했는데
이 문제를 전차들이 해결했다.
동굴 입구를 겨냥해 포탄을 발사하자 적군들이 백기를 들고
꾸역꾸역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북괴군들은 해병 제266독립연대 3대대와 제918 포병연대 소속 병력 등
400여 명이었다.
미 제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Blue Beach)에 각각 상륙하였다.
미 제5해병연대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Green Beach) 상륙작전은
오전 중에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 경부터 UN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쪽의 적색해안(Red Beach)에 상륙하였다.
또한, 월미도 맞은편의 황색해안(Yellow Beach)에서는 인천 시가지에 대한
정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산군은 서울위수 제18사단과 인천경비 여단,
그리고 제31여단 예하의 1개 대대 등을 인천 일대에 배치하고 있었다.

▲ 5000 대 1의 성공확률이라 한 인천상륙작전 현장을 지휘하는 맥아더 사령관, 기함 맥켄리 호 함교.
▲ 로페즈 미 해병 중위
▲ 이 사진은 인천상륙작전의 2개의 기념비적 사진 중 하나.
맥아더 사령관이 기함 함교에서 망원경을 들고있는 사진과 더불어, 로페츠 중위가 제일 먼저 사다리를 타고
암벽을 오르는 사진이다.(촬영자 미상) 로페즈 중위는 상륙한 직후 전사하였다. 1950.9.15.
Baldomero Lopez, (1925년 8월 23일 – 1950년 9월 15일)
▲ LSMR 로켓포함이 월미도에 사격을 하고있다. 1950.9.15
▲로페즈 기념비; 미국 탐파 시 / 에디 고 씨( 사진 좌 )와 참전용사들이 세웠으며,…., 한국 인천시와
백선엽 장군등이 인천 상륙해안에서 선정 수집한 돌을 보내왔다.
▲ 6·25전쟁 당시 인천 영흥도에서 상륙작전에 앞서 정찰대원들과 함께한 소년 에디 고. (뒷줄 왼쪽 세 번째, 흰 옷, 모자)
뒷줄 왼쪽 네, 다섯, 일곱 번째가 각각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미 해군 대위
▲ 2007년 11월 11일 미국 재향군인의 날에, 로페즈 중위의 기념비가 탬파市 인근 키스톤 에드레디스 공원

한국전쟁기념광장에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로페즈 중위가 전사한 인천 앞바다에서 공수해 온 85kg의 돌로,
‘The Green Beach Point of Incheon Landing Operation’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私費 를 털어 이 기념비를 세운 재미동포 고준경(75.미국명 에디 고)씨는
“인천에서 직접 공수해 온 돌을 보고 그들(6·25참전용사)도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 해병대는 최초일(D-day 작전) 상륙작전을 완수하였으며, 인천시를 장악하였다.
▲ 월미도에서 나포된 북괴군 포로들. (9.15)

 

9월 16일 (84일 째 / D+1)

* 인천상륙 해병대, 서울로 진격 개시

* 낙동강 방어 UN군, 총 반격 개시

▲ 인천으로 직접 상륙하는 맥아더 사령관. (1950. 9. 16)
왼쪽부터 휘트니 장군, 스트블러 제독, 맥아더 , 스미스 미 해병제1사단

9월 16일 새벽이 되자 적 치하에서 신음하던 인천은 완전히 탈환되었고,
한반도 중부의 가장 큰 항구인 인천항을 온전하게 확보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사에서 보기 드문, 직접 항구로 상륙하여 장악한 작전이었다.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략 시설인 항구 일대는 항상 경비가 엄중하므로
이곳을 피해 작전을 펼치는 것도 초기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항구로 직접 상륙하는 발상을 전환으로,
초전에 인천항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만일 인천항을 즉시 확보하지 못했다면 서울로 향한 진격은 힘들었을 것이었다.
후속하는 부대와 물자가 상륙한 후에야 내륙으로 진격이 가능한데,
이를 위해서는 해안가에 교두보를 확보하여야 한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은 작전 개시와 동시에 최고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었다.

▲ 투항하는 북괴군 병사. (인천 1950. 9. 16)
▲ 인천상륙군 미 해병들이 서울로 가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1950. 9. 16)
▲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 반격으로 후퇴를 하던 북괴군의 일부가 붙잡혀 포로가 된 모습이다.
공세에 밀렸던 북괴군의 일부 병력은 지리산 등 깊은 산 속에 숨어 들어가 빨치산에 합류했다.
이들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후방치안을 크게 위협한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경북 왜관 근처의 낙동강에서 한국인 인부들이 미 제1기병사단의 중화기 도하를 돕기 위해 흙을 집어넣은 마대를 깔아
강바닥을 다지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 UN군 반격에 주역을 맡은 미국 셔먼 탱크 위용

 

9월 17일 (85일 째 / D+2)

미 해병대, 김포비행장 점령
UN군, 왜관 육박

*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 오후 8시 김포비행장 점령,
한강(漢江) 서남부 도달
* 북괴군, 영천지구에서 사단장(師團長) 도주(逃走)

▲ 인천항 군수물자 하역 모습 (1950. 9. 17)
▲ 김포기지를 점령한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 ( 9. 17)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에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남게 되었는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천연적 장애요인을 극복한 상륙작전이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데, 사실 그보다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다.
갯벌만 없다면 썰물 때도 상륙은 가능하지만
인천일대의 거대한 갯벌은 밀물 때만 상륙할 수밖에 없는 시간적 제한을 가하였다.
즉 인천상륙작전은 시간과 공간의 2중 제약을 극복하고 이뤄낸 성과였다.

▲ 김포비행장에 남겨진 파손된 볼썽 사나운 미군 항공기 잔해
▲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으로 진격, 왜관을 육박하는 미 제8군부대 이동 모습
▲ ‘수염이 이상?’‘짚신이 이상해요?’‘옆구리에 찬 것은 뭐요??’ (1950. 9. 17)
▲ 인천 외곽지역, 국군 헌병이 북괴군 패잔병을 색출하여 검거하는 모습. (1950. 9. 17)
▲ 인천 시가지 모습. (1950. 9. 17)
▲ 경인철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는 미 해병대. (1950. 9. 17)

9월 18일 (86일째 / D+3)

상륙군 서울로 진격 중,
영등포 돌입, 한강변까지 진격

* 상륙군, 경인가도에서 북괴군의 역습 전차 16대 격파
* 해병대, 영등포 외곽 돌입
* 미 해병대, 서울 서북방 한강에서 진격
* 콜롬비아, 순양함(2천톤 급)을 UN의 한국지원활동에 제공 발표

▲ 상륙 후 배후의 안전과 교두보가 확실하게 장악되자, 지체하지 않고 격렬한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진격할 수 있었다.
역습전차들을 궤멸하고, 포로들을 나포하면서 전진하는 상륙군들.
“시원하게 발가 벗겼군….”
▲ 서울외곽 주민들의 열열한 환영을 받고 진군하는 상륙군들, 9.18
▲ 두 명의 북괴군 소년병이 서울 근교에서 나포되어 심문을 받고있다.
이 녀석들이 그후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노년으로 잘 살고 있을텐데···
애들이 깨끗한 편이네···. (1950. 9. 18)
▲시가전, 적 저격에 부상 당한 병사를 옮기고 있다. (9.18)
▲ 드디어 영등포 지역에 도착, 적정을 살피고 있다. (9.18)

 

9월 19일 (87일째 / D+4)

서울탈환 작전

*상륙군, 한강 도하 시작, 김포비행장 사용
* 선봉대, 서울 서남 교외 3km에 돌입
* 해병대 수색대, 한강 4개처 도하

UN군,국군의 서울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미 제10군단은 9월 18일부터
서울을 향한 진격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배속)은 서울의 서쪽에서 시가지를 향해 공격하도록 하고, 미 제7보병사단(국군 독립 제17연대 배속)은
서울의 남쪽에서 북괴군의 증원차단과 함께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상하는 미 제8군과 연결하도록 했다.

북괴군의 서울 방어작전 개요
국군과 UN군의 서울공격이 시작되자 북괴군은 제9사단과 제18사단 등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의 시가지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전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고지를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따라 서울 서측방과 남측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서울 수복까지의 아군의 전투 개요
미 제10군단은 행주와 마포, 신사리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연희고지와 망우리, 구의동 일대의 북괴군 저지진지를 공격해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다.
27일에는 공격부대가 삼각지와 남대문, 회현동
일대의 잔적을 격멸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어서 9월 28일, 공격부대들은 북괴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그날로 북괴군의 저항은 끝났으며 수도 서울은 인천상륙 후 2주일,
북괴군에게 피탈당한 지 3개월만에 완전히 수복되었다.

19일 작전
미 해병 제1연대가 18일 소사(素砂)를 탈환한 다음 영등포를 향하고 있을 때에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해병 제1연대와 제2연대는 행주(幸州)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19일에 그 준비를 서둘렀다.
19일 야간을 이용한 도하작전은 미리 알게된 적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20일에야 도하를 강행하는데 성공하여, 능곡에서 수색 방향으로 적을 압박하였다.

▲ 해병, 서울외곽 진입하여 북괴군을 몰아내고 있다. (1950. 9. 19)

 

9월 20일 (88일째 / D+5)
상륙군 한강 도강

* 미 해병 제5연대, 한국 해병대: 한강 도강, 수색으로 진격 중
* 이승만 대통령, ‘38선 진격문제’에 대하여:“UN결정에 따르겠다”

▲ 행주나루를 도강하는 LVT-3C (Landing Vehicle Tracked,1950. 9. 20)

LVT-3C 상륙돌격장갑차는 인천상륙작전 때 월미도에
최초의 강습 해병 전투병력을 태우고 쇄도했었다.
내륙의 강에서 해병들이 LVT-3C로 도강 작전을 한 것은 극동에서는 처음이다.
해병들이 LVT로 한강을 건넌 곳은 행주나루, 마포, 그리고 반포의 세 곳이다.
LVT의 활약으로 해병들은 서울을 방어하는 북괴군이
천혜의 방어물로 활용할 수도 있었던 한강을 비교적 손쉽게 도강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행주산성에 방어선을 치고 악랄하게 저항하며
해병들에게 40여 명의 전사자 피해를 준 북괴군의 측면으로 돌아 Cal.50 기관총으로
고지 위의 북괴군들을 공격함으로써 작전을 성공하였다.

에피소드 : 원일한 박사
언더우드 미 해군대위( Lt. Horace G. Underwood USN)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인 언더우드 2세(한국명 원일한)는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해군대위로서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장교로 재소집(예비역), 낙동강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 후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한강도하작전에서는 해병수색대 요원으로(통역장교) 참전하는 등,
그리고 후에 휴전회담에서는 통역을 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고,
2004년 타계할 때까지 우리나라 대학교육 발전을 위하여도 수많은 공로를 이루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치 중이다.

▲ 원일한 박사
▲ 문산리에 있던 정전회담 본부에서 리처드 언더우드 미육군 중위 (한국이름 원특한, 왼쪽)가
작은형 존(가운데)과 맏형 호레이스(한국이름 원일한) 미해군 대위와 함께.

흥미있는 에피소드
LVT가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은 미 해병 제1사단 차상급 부대인
미 제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이 육군 소속의 제56상륙궤도차량 대대의 제56중대
LVT 18량을 해병대에 배속시켜 주었다.
이 곡사포 장착 LVT들이 앞장서서 한강 도강 작전을 성공시켰다.
육군은 오키나와 작전 같은 대형 상륙작전에 LVT가 필요해서 자체 부대에
이들을 갖고 있었다.
한강 돌파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육군 LVT부대는 그 전공으로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 한강을 도강한 LVT가 마을을 지나고 있다. (9. 20)
▲ 서울 탈환 작전은 미군 전사(戰史)에 ‘바리케이드 전투’로 불린다.
북괴군이 발악적으로 시민들을 동원하여 2-300미터 마다 가마니와 폐자재로 차단 장애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포격과 화재에 놀라서 미군 지역으로 피신해 오는 서울 시민들. 땅에는 전차(電車) 전선이 끊켜 떨어져있다.

 

9월 21일 (89일째 / D+6)

상륙군, 서울 서측 6km 도달

* 영등포 북괴군 보급소 폭파
* 서울 외곽 전역에서 북괴군 소탕전 개시
* 미 제1기병사단, 낙동강 전선 돌파, 다부동 진출

* 적치(赤治) 3개월 간

9월 20일 새벽 2시,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가 김포공항에서 행주산성으로
최초로 한강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을 만큼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북괴군의 의지는 강력하였다.
결국 엄청난 폭격으로 북괴군의 저항 근거지를 제거한 후, 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장악한 아군은 곧바로 신촌 방향으로 진격하여 들어갔고
21일 저녁에는 중앙청 바로 목전인 연희동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남쪽에서 진격한 미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 시가지에서
치열하게 방어에 나선 북괴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22일 아침 노량진 한강 일대까지 다가갔다.

▲ 서울 외곽에 진입한 미 해병들, 참호는 북괴군들이 파놓은 것.(1950. 9. 21)
▲ 서울 외곽에 진입한 해병대. “잠시만….. 쉬었다가…..”(1950. 9. 21)

북괴군 점령 3개월 간에 있었던 일들

▲ 시민들을 ‘인민재판’에서 ‘반동’으로 ‘유죄판결’한 후 총살 집행장으로 끌고 가고 있다.
▲ 서울 점령기간 동안 벌어진 정치 선동행사 (출처-동아일보)
▲ 숨어서 지낸 3개월이 마치 30년 같았다는 이야기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무차별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던 이른바 ‘인공(人共)통치 3개월’이라 언급되는 이 시기는
우리에게 씻기 힘든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었고 이것은 이후 전쟁 그 자체보다 더 크게
남북 간을 심리적으로 멀리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낙동강(洛東江) 전선(前線) 개관(槪觀)

* 미 제1기병사단의 다부동 진출

▲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의 낙동강전선 돌파. (1950. 9)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9월 15일 현재, 미 제1기병사단은
188고지(독산동) – 175고지(성문동) – 402고지(명봉산) – 571고지(성원동)를 연해 좌로부터 제5기병연대, 제8기병연대, 제7기병연대가 배치되어 북괴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지만,
미 제1기병사단 정면의 북괴군은 전과 마찬가지로 기병사단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강력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북괴군은 15일 새벽에 제5기병연대를 향해 협조된 공격을 가하여
175고지, 350고지(건령산 서북쪽 0.5㎞ 염불사 부근), 402고지의 북사면을 점령한 후
11시 25분 경에 북한군 1개 대대가 175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포와 박격포를 동원한 북괴군의 공격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성원동 571고지의 제8기병연대 제2대대에도 북괴군의 포와 박격포 공격이 있었지만

제2대대는 이 고지를 사수하였다.

제8기병연대 지역에서는 17시 30분경 5대의 북괴군 전차가 동명면 동명원
(571고지 서북방 2㎞) 부근에 출현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의 총공세가 예정된 9월 16일은 왜관지역에 예정된
Bᐨ29폭격기의 폭격이 취소될 정도로 기상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09시로 예정된 총공격에 앞서
제7기병연대의 제2대대를 좌측 제5기병연대 지역의 188고지 부근으로 이동시킨 후 폭우를 무릅쓰고 반격을 감행하였다.
사단에 배속된 제5연대 전투단이 금무봉(268m)을 향해 공격하고, 제5기병연대가
제2대대를 중심으로하여 왜관ᐨ대구 도로 북쪽의 203고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괴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피아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제5기병연대 지역에서는 북괴군 제3사단 제8연대 병력이 203고지ᐨ175고지를
제1선으로, 253고지(203고지 서북방 2.5㎞) ᐨ 372고지(장원봉, 175고지 서북방
2㎞)를 제2선으로 하여 저항하였으며, 제8기병연대 지역에서는 오히려 북괴군이
제2대대의 571고지에 반격을 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작전지역의 기상이 호전되자 9월 18일부터는 항공지원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날 왜관 서안 일대에는 Bᐨ29폭격기 42대의 폭격이 실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1기병사단의 전진은 크게 진척되지 못하였다.
제5기병연대는 제2대대가 이날 저녁 203고지를 탈환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어 253고지ᐨ372고지(장원봉)로의 진출은 좌절되었다.

이 무렵 미 제1기병사단의 우인접 부대인 국군 제1사단이 다부동ᐨ군위 도로로
진출함으로써 북괴군 제1, 제13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다부동 일대의 북괴군은 퇴로 타개를 위해 후퇴할 수밖에 없어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반면에 미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 남쪽에서의 고착상태를 해소하고 전진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 중 략 –

국군 제1사단과는 대조적으로 주공인 제1기병사단의 진출은 부진했고,
특히 다부동 남쪽의 제8기병연대의 작전이 너무도 지지부진하자,
이날(18일) 제8군사령관은 군단장과 사단장에게 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군단장과 사단장은 제8기병연대가 과감한 공격을 하지 않은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제1기병사단장은 전방 양개 연대에 사단예비에서 각각 1개 대대씩을
배속 조치하고, 특히 제8기병연대장에게는 다음날 19일 중으로 반드시 전선을
돌파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앞서 군단장은 제1기병사단의 진출 부진으로 인한 군단 목표달성의 지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동계획상의 중요한 변경조치를 18일 18시부로 단행하였다.
예비인 제24사단을 군단 서측방으로 투입하고 제5연대전투단을 이 사단으로 배속 전환시켜 이들로 하여금 신속히 전선을 돌파하고 김천 방향으로 전진하게 한다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제1기병사단은 왜관 탈환을 제24사단에게 맡기고 다부동 방면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중 략-

제7기병연대 제3대대는 20일 아침에 다부동 남쪽에서 왜관 방면으로 전진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연대장 니스트(Cecil Nist) 대령이 북괴군의 야포와박격포
사격을 우려해 대대를 도보 행군시킴으로써
장병들의 피로가 누적되고 목표지점까지의 집결 시간도 늦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3대대는 제1대대의 뒤를 따라 저녁에 도개동 부근에 진출하였다.
제3대대의 진출이 늦어지고, 제1대대 마저 전방의 험준한 산에 부딪히게 되자
연대장은 야간공격을 단념하고
다음 날 미명에 공격하기로 결정한 후 야영을 준비시켰다.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제7기병연대가 계속 진격하지 않고 야영하는것을 알고서 격노하여 연대장
니스트 대령을 해직(解職)하고 연대를 지원하던 제77야포대대장
해리스(William A. Harris) 중령을 20일 23시부로 연대장에 임명(任命)하였다.

사단장의 이와 같은 조치는 사단 우측의 제8기병연대가 북괴군 제13사단의
저항으로 계속해서 부진한 진격상태를 보이자 제7기병연대를 급진시켜
북괴군을 포위 격멸하고자 했던 사단장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7기병연대장이 진격을 늦추고 있었던 것에 대한 문책성 조치였다.

▲ 단장과 해리스 중령
▲ 드디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으로 진격하는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 (1950. 9)

20일 밤중에 지휘권을 인수한 해리스 중령은 대대장들을 집합시켜 다음날의
연대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명령에 의하면, 제1대대는 제1선으로 다부동을 향하여 급진하여 제8기병연대
정면의 북괴군을 배후에서 공격하며, 제3대대는 제2선으로 다부동에서 제1대대의 우익을 초월하여 북진함으로써 제1대대의 배후를 엄호함과 아울러
국군 제1사단과 제휴해 부근의 북괴군을 격멸하라는 것이었다.

9월 21일 제70전차대대 C중대의 지원을 받는 제7기병연대 제1대대가
제8기병연대 제1⋅2대대와 연결하기 위해 진격하여
12시 55분에 다부동 외곽에 진출한 후 저항하는 북괴군을 서북과 서남 양면에서
협공하여 격파한 다음 17시에 다부동을 탈환하고 계속해서 남진하였다.
제7기병연대 제1대대는 1시간 후 삼학동 부근에서 제8기병연대와 연결되었다.
제8공병대대와 제70전차대대로 증강된 제3대대는 제1대대의 후방 접근로와 고지를 확보하였으며, 제2대대는 이전에 영국군 제27여단이 확보한 진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제5기병연대는 제5보병연대전투단 제3대대를 대체할 임무를 완수하고서
300고지와 부근 일대의 북괴군을 일소한 후 저녁에 북진을 위한 집결지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국군 제1사단은 이미 다부동 북방의 상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한 후,
제15연대가 기병사단과 제휴하기 위하여 남진하고 있었다.
대구 정면의 북괴군 제1, 제3, 제13사단은 와해되어 나머지 패잔병들이
상주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특히 북괴군 제13사단의 경우 많은 장교들이 아군에 투항하였는데, 21일 오전에
북괴군 제13사단 참모장인 이학구(李學九) 총좌가 투항(投降)하여
중요한 정보자료를 제공하였다.
이학구 총좌는 아직 UN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 북괴군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 미 제1기병사단에 투항. (1950. 9. 21)

 

9월 22일 (90일째 / D+7)

상륙군 미 제7사단 수원방면으로 진격

* 국군 해병대, 서대문 방면 구시가 (舊市街)돌입
* 미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톤 쇼, 서울 수복작전 중 전사(戰死)
* 의성, 군위, 청송, 칠곡 경찰서 복구

▲ 1950.9.15 이후 국군과 UN군의 반격노선 요도

미 제1기병사단의 활약상
9월 21일을 기해 미 제1기병사단 부대들이 대구돌출부를 돌파하기 시작하자
사단장 게이 소장은 제7기병연대장 해리스 중령에게 북괴군을 추격할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도록 지시하였다.
해리스 중령은 작전계획 제18호로써 제777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부대는 린치(James H. Lynch) 중령의 제3대대가 선두로써
미 제8야전공병대대 B중대, 미 제70전차대대 C중대의
2개 소대(M4전차 7대), 미 제77야포대대, 중박격포중대 제3소대 및 연대 수색소대,
그리고 1개 전술항공통제반으로 구성된 기갑추격부대였다.
9월 22일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제8군 작명 A101호로서 추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작전 명령과 관련해 미 제1기병사단에 부여된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적중 깊이 돌진하여 압박, 포위, 우회로써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후퇴를 저지함으로써 적을 격멸할 것이며, 미 제1군단은 주공을 大邱 – 김천 – 대전 -水原 축선에 두고 진격하여
미 제10군단과 연결하라”는 것이었다.

미 제1군단은 제1기병사단의 엄호 하에 제24사단을 돌진시킬 계획이었으나 상황의 진전에 따라 이를 수정하여 병진 추격시킬 것을 결정한 후 추격명령을 하달하였다.

▲ 낙동강을 도하하는 UN군, 미 제24사단. (1950. 9)

이 명령에 따라 미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 – 선산도하장 – 상주 – 보은 -청주 –
水原선을 따라 돌진하여 미 제10군단과 연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미 제24사단이 대전을 향하여 추격하고, 국군 제1사단이 미 제1기병사단을 후속해 낙동강을 도하한 후 예비가 되도록 계획되었다.

9월 23일 린치부대는 수색대의 보고로 적이 도하하던 지점의 수위가 허리에
찰 정도라는 것을 알고, 04시 30분에 I 및 K중대부터 도하를 시작하였다.
05시 30분경에 양 중대는 도하를 완료하고 대안의 제방을 점령하였다.
린치부대는 다부동을 출발한 이래 500여 명의 북괴군을 사살 또는 생포하고
5대의 전차와 각종 장비를 노획하면서 마침내 낙동강을 건넜다.
이날 중 제1대대는 낙동강 도하 후 16㎞ 서북방의 상주까지 진격했으나
북괴군은 이미 후퇴한 후였다.

이 무렵 미 공군은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6. 25전쟁 기간 중 최대 규모의
근접항공지원을 감행하였다.

제24사단의 진격이 의외로 늦어지는 상황에서 제5연대 전투단은 9월 19일
부대원 전원이 왜관 동남쪽에 있는 금무봉에 대해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금무봉은 북괴군 제2군단의 우측 거점으로서
아군이 이 고지를 탈환할 경우 미 제5기병연대의 동쪽 측방에 위치한
북괴군의 진지들을 붕괴시킬 수 있는 전술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북괴군도 제3사단장 이영호 소장이 1,200명 규모로
추산되는 병력으로 전차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남쪽의 왜관에 이르는 접근로를
막아내고 있었다.

▲ 낙동강을 도하하는 제12연대 지휘소. (1950. 9)

9월 22일 10:00시경 미군 공병들은 36시간에 걸친 작업을 계속한 끝에
폭 230m, 수심 2.5m나 되는 낙동강에 M-2주교의 가설작업을 완성시켰다.
이에 따라 부대 및 중장비, 그리고 보급차량이 밤중에 낙동강 서편으로의 이동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이때 부대원들은 차량에 ‘大田전투를 想起하자!’라는 격문을 달아
진격의 대열에 나섰다.
금호강에서의 혼란과 제21연대의 낙동강 도하 지연 등의 몇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미 제24사단이 9월 18일부터 5일간 수행한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왜관을 탈환하고 낙동강 도하작전을 끝마친 미 제24사단은 북괴군을 추격하고 전과를 확대시킬 준비를 끝마친 후 왜관 – 대전 사이에 북괴군의 야전군사령부(野戰軍司令部)가 위치하고 있는 김천(金泉)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하였다.

▲ 미군의 낙동강 도하를 돕는 한국 민간인들 흙포대를 만들어 강바닥에…..(1950. 9)
▲ 미군 고전분투 계속, 낙동강 전선, 전황은 역전되었으나…..(1950. 9. 22)
▲ 미군장비 이동, 다행히 낙동강 전선 지역 논에 추수흔적이 보인다. (1950. 9)
▲ 왜관 부근, 파손된 북괴군 장비들. (1950. 9. 21)

美 海軍大尉 쇼( Lt. William Hamilton Show, US NAVY) 戰死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전투는 만만치가 않았다.
연희동 부근서부터 중앙청(현재 광화문)까지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9월 22일,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연희고지를 공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였다.
목표까지 거리는 불과 1km 정도였지만 이곳을 요새화한 북괴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이틀이 지나도 점령은 커녕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말았다.
결국 국군을 대신하여 미 해병대가 공격을 계속하였는데도 연희고지는 함락되지
못하였고, 결국 항공기의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고 있었다.

▲ 윌리암 해밀톤 쇼 미 해군대위

1922년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는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6. 25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다시 해군에 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고, 서울 수복작전 전투 중
서울 은평구 녹번리에서 공산군의 흉탄을 맞고 9월 22일, 29세의 나이로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그는 현재 서울 양화진에 묻혀있으며,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으로 기려지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공원이 2010년 6월 그의 전사 장소에 준공되었다.

▲ 은평공원 모습
▲ 윌리엄 쇼 대위의 흉상.

 

9월 23일 (91일째 / D+8)

김일성(金日成), 총후퇴(總後退) 명령

* 대구(大邱)를 눈앞에 두고···
* 미 해병대, 서울 이화여대 뒷고지 점령
* 낙동강 철교 긴급 가설공사 착공

낙동강 전선 역전- 동부전선(안강 – 기계방면)
북괴군은 ‘한반도 공산화’라는 그들의 전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총공세를 단행했다.
8월공세(8. 4 – 8. 25) 때 북괴군은 13개 보병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을 투입해
전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 북괴군은 대구 정면과 아군의 배치가 취약한 마산 정면에 주공을 지향했다.
그러나 북괴군은 이곳에서 부분적인 돌파에는 성공했지만 돌파구 확장에 실패했다.
여기에는 한미연합군의 조직적인 방어와 성공적인 空·地 합동작전 수행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괴군 9월공세 실패
9월공세 때(9.1 – 9.15)는 13개 사단 모두를 5개 공격집단으로 편성하여
대구· 영천· 경주· 창녕· 마산 정면에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북괴군은 9월 공세도 실패했다.
 낙동강전선 방어작전의 성공은 한국정부의 총력전 체제 구축과 전쟁지도,
한미군 수뇌부의 역량있는 작전지도,
이를 믿고 따른 국민과 장병들이 하나로 굳게 뭉친 결과의 산물이었다.

형산강 방어 전투(주 저항선의 회복)
형산강 방어 전투는 전쟁기간 중 9월 5일부터 13일까지 형산강을 도하(渡河)하여
포항으로 진출하려는 북괴군 제5사단을 국군 제3사단이 저지한 전투이다.

기계- 안강전투 결과

9월 5일 무릉산~곤계봉~형산강 선에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한 동부전선의 국군과 UN군은 격전 끝에 이 선을 확보하였다.
특히 9월 12일 곤계봉 탈환을 계기로 급반전된 전황은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연결됐다.
9월 16일 반격을 개시한 수도사단은 다음날 형산강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9월 18일 안강을 탈환하고 어래산~445고지~145고지~236고지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낙동강방어전이란 이름과 달리 실제 당시 국군이 전투를 수행한 장소는
대구 북방과 영천, 기계, 안강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였다.
국군과 연합군은 1950년 9월 18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성공한 뒤
거센 기세로 북진을 시작했다.

▲ 국군 장병들이 57㎜ 대전차포를 차량에 매달고 수원 쪽을 향해 북진하는 도중 포즈를 취했다.
대전차포 위에 무늬가 선명한 태극기를 꽂아 놓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 낙동강을 도하 반격하면서, 노획한 인공기. (1950. 9)
▲ 낙동강 대반격을 개시하기 전 부대 점검을 하고있는 미군들. (1950. 9. 18, 미 국립기록문서보관청)
▲ 서울 연희고지 근방 시가전 모습, 미해병대. (1950. 9. 23)
▲ 미 해병들, 서울 한옥촌에 혹시 북괴군이 남아 있는지 수색작전을 펴고 있다.(1950. 9. 23 )
▲ 낙동강을 넘으며 숨어있는 북괴군 병사를 나포하는 국군용사들 – 소련제 장총까지 뺐었다.(1950. 9. 23)

 

9월 24일 (92일째 / D+9)

* 미 제1해병사단, 서울 남부 교외 돌입
* 드디어 인천에 상륙한 국군 보병제17연대 ! ( 육군도 인천에 상륙했어요! )

▲ 국군 제17연대, 함정 탑재 대기 중. (부산 부두, 1950. 9)
▲ 제17연대 기
▲ 제17연대 장병들, LST함상에서 상륙 대기 중. (인천, 1950. 9. 24)
▲ 인천에 상륙하는 국군 보병 제17연대 장병들. (1950. 9. 24)

제 2보병사단 제17연대 병사들이 해병대의 병력보충과 인천 주변 섬 정복 ,
수도탈환 등에 힘쓴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사실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에 가려져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지 ,
그들이 그 옛날 6.25에 미 해병대,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인천을 탈환하고 , 수도 서울을 탈환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 북괴군이 쌓은 바리케이트를 방패막이로···
▲ “저 저격병을 잡아라 !”

八尾島 燈臺 불빛 밝혀 仁川上陸 一等公臣
암흑 속의 祖國 밝히다 !
‘KLO’ 최규봉 씨

▲ 최규봉 씨
▲ KLO 최규봉 씨 충무무공훈장 받아, 해군참모총장 전달

최규봉 KLO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은 192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이후 반공 활동을 펼치다 소련군에 체포됐다.
탈출 후에 38선을 넘어 반공단체에서 활동하다 1946년부터 미군 정보요원으로
활약했다.

6. 25전쟁 중에는 미군 KLO 예하 고트부대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군 관련
첩보 수집에 공헌했다.

2008년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밑거름 역할을 한 공적과 KLO 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제공함으로써
해군작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명예해군으로 위촉됐다.

2010년 인천상륙작전 성공 60주년을 기념하는 재현행사 때도 초청받아
팔미도 등대를 점등해 재현행사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팔미도 등대 점등 등 6. 25 당시 공적을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을
수훈했다.

 

▲ 최규봉 씨, 충무무공훈장
▲ 파손된 T-34전차 모습. (낙동강전선, 1950. 9. 22)
한바탕 하고 나서··· “ 아~ 피곤해···· ”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

 

9월 25일(93일째 / D+10)

해병대, 서울 진격 속도; 670m/하루

* 북괴군, 개전 이래 서울방어: 최대 저항 중
* 미 제1기병사단 조치원 돌입, 천안 탈환

연희 고지 전투
북괴군은 9월 23일까지 사흘 동안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으나, 9월 24일 한미
해병대는 함재기(艦載機)와 포병(砲兵)의 압도적인 화력(火力) 지원을 받아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끝에 이튿날인 25일 마침내 이 고지들을 빼앗았으며,
그곳에서 서울시가를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 고전하는 미군들. (1950. 9. 22)
▲ 서울 수복전투 : 시가, 지하, 도랑 속에 적군이 숨어있는지를··· (1950. 9. 24)
▲ 연희고지를 탈환하고, 서울시가지를 내려다 보는 해병들. (1950. 9. 25)
▲ 서울탈환전투 중인 미 해병대원들의 모습. (1950. 9. 25)

에피소드 : 국군 해병 제3대대장

▲ 김윤근 장군의 근영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국군 해병대는 1개 연대(3개 대대) 규모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대대장급 이상 해병대 주요지휘관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된 김윤근(해사1기ㆍ해병대 중장 전역) 당시 3대대장이증언했다.

“해병대 3대대는 1950년 7월 말 편성을 시작,
8월 초 남제주에서 신병훈련을 시작했다.
9월 초 해군 수송함 편으로 진해로 이동해 잠시 기지방어임무를 맡았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신현준 해병대 연대장과 세 명의 대대장이 남포동 어느 건물에 있던 미 해병1사단 사령부를 방문했다.
미 해병사단 측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병력과 병기 상태를 상세히 물어왔다.

다음날 부산 제1부두에 미군 트럭 30여 대가 도착,
우리 해병대 연대에 보급할 M1소총, 카빈 소총, 브라우닝 자동소총(BAR),
박격포, 피복, 장구 등을 내려 놓고 돌아갔다.
다음날 동래사격장에서 새로 받은 총포로 실탄사격을 연습한 후
부산항 제1부두에 접안한 미 수송함에 승함했다.

그때까지도 우리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배에 탄 후 처음으로 인천상륙작전 계획 내용을 브리핑받았다.
우리 3대대는 미 해병5연대에 배속돼 상륙한다는 사실도 통보받았다.

때마침 태풍이 북상 중이어서 인천으로 가는 항해는 험난했다.
그러나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병기의 조작법을 교육해야 했다.

9월 15일 새벽 5시
상갑판에 올라가 보니 미 해군의 군함과 화물선이 인천외해에 가득했었다.
미 해군과 해병대의 상륙작전 규모가 크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으나 새삼 그 큰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새벽 6시 미 해병대 제5연대 제3대대가 월미도에 상륙해서 격렬한 전투 끝에
월미도를 확보했다.
한국 해병 제3대대를 포함한 미 해병대 제5연대 본대는 15일 오후 만조시간에야 상륙할 수 있었다.
상륙부대를 내려놓고 해안을 떠나려는 상륙주정(LCVP)과 상륙부대를 상륙시킬
자리를 찾는 LCVP가 뒤엉켜서 상륙 해안은 대혼란의 도가니였다.

자리를 찾지 못한 LCVP는 아무 곳에나 병력을 내려놓았다.
우리 대대도 막상 해안에 올라보니 중대가 뒤섞여 있어,
상륙한 해병들은 자기 중대를 찾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월미도와 달리 본대 상륙 때는 적의 저항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상륙 후 해병대 1ㆍ2대대는 서울 수복작전에 참가했고,
우리 3대대는 김포반도를 방어하면서 서울 수복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

 3대대는 9월 16일 인천 시가지 일대에서 잔적(殘敵)을 소탕한 후,
17일 경인가도(京仁街道)를 따라 부평(富平)으로 향했다.

▲ 수복당시 숭례문 주변 모습.(1950. 9)

 

9월 26일 (94일째 / D+11)

미 인천상륙군 / 북상 미 제8군 비상, 오산 북방에서 연결작전 중 !

* 미 제1기병사단 린취 특수임무부대, 서정리(오산-평택 간)에서
상륙군 미 제10군단 예하 제7사단 제31연대와 합류(合流)
* 한미 상륙군 해병대 서울 진격 중 연희동 및 마포 쪽에서 중앙청 쪽으로,
* 미 제7사단 병력 일부, 서빙고, 뚝섬 방향에서 서울 시내로,
* 국군 제17연대, 하왕십리로 진출, 망우리 점령
*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야간통행금지 시간 연장 발표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들어간 국군과 UN군은
9월 20일부터 적진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경부국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면서 북상하던 미군 제1기병사단의 선발대는
9월 26일(27일 새벽) 오산 북쪽에 이르러 남하중이던 미군 제7사단 선발대와
합류하였다.

▲양쪽에서 전진하던 아군의 선두 부대들은 오산부근에서 연결.

인천상륙부대와 연결작전

반격작전의 주공인 미 제1군단의 임무는 신속한 전진으로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연결하여 낙동강 서부지역에 투입된 북괴군 제1군단을 포위하고
이로써 동서로 양단된 적 지상군을 국군과 미군이 각개 격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 M4 셔먼 ‘ Tiger Face’ 전차

다부동 전선을 돌파하고 9월 22일부로 추격명령을 받은 미 제1기병사단장은
예하의 제7기병연대를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고 이를 선두로 추격작전을 

전개하기로 기동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제7기병연대장은 제1, 제3의 2개 대대와
배속받은 전차 및 포병부대 등으로 제777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이중 린치
(James H. Lynch) 중령의 제3대대에 미 제70전차대대 C중대의 제2, 제3소대,
제77야전포병대대(ᐨ) C포대, 중박격포중대 제3소대, 제8야전공병대대 B중대 제2소대제77야전포병대대 전방관측반, 연대정보수색소대, 1개 전술항공통제반,
제13통신중대 SCR399 무선반, 1개 의무소대 등을 배속하여
별도의 린치특수임무부대를구성하였다.

– 중 략 –

전차부대가 도착하자 연대장 해리스 중령은 린치특수임무부대를 충북 보은으로
출발시켰다.
사단은 선두인 제777특수임무부대가 보은에 머무는 동안
24~25 양일 간에 다른 부대를 상주 및 낙동리지역에 집결시켰다.
25일 해질 무렵 사단에는 군단으로 부터 더 이상 진출하지 말라는
전문 지시가 하달되었다.
이 전문을 접한 사단장은 즉시 군단에 이의 제기를 하고자 했으나
군단과의 통신이 되지 않았다.
이에 미 제1기병사단장은 連絡機 편으로
제8군사령관에게 ‘수원에서 미 제10군단과 연결할 것을 원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날 한밤중에
제8군사령관은 “계속 전진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9월 26일 오전 상주에서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12시를 기해 제777특수임무부대는 보은ᐨ청주ᐨ천안ᐨ오산 도로를 따라
다시 추격을 계속하고, 사단사령부와 포병부대는 그 뒤를 후속한다.
제8기병연대는 충북 괴산을 거쳐 안성으로 진격한다.
제5기병연대는 오후 국군 제1사단과 임무를 교대한 후 함창 공격을 중지하고
조치원을 거쳐 천안에 진출하여
남쪽 및 서쪽에서 후퇴해 오는 적을 봉쇄하고 사단후방을 경계하라.”

보은에 위치한 관계로 이날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제777특수임무부대장
해리스 중령에게는 08시 30분경에 무선으로
“제7보병사단과의 연결을 위해 진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명령은 즉시 제777특수임무부대의 선두인 린치부대에 전달되었다.
이 명령과 더불어 린치 중령에게는 상황에 따라 계획된 진로를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린치 중령은 최선두에 연대 수색소대와 제70전차대대 C중대 제3소대를 위치시키고
제3소대장 베이커(Robert W. Baker) 중위에게 전차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으로
전진할 것과 사격을 받지 않는 한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베이커 중위는 계획보다 30분 앞서 11시 30분에 보은을 출발하여 전속력으로
북상하였다.

해리스 연대장은 린치 중령에게 대대장의 판단에 따라 차량의 전조등을 켜고
야간에도 계속 전진하라고 지시하였다.

– 에피소드 –

여기서부터 대대장은 베이커 전차소대를
연대수색소대보다 더 앞으로 내세우고 또 다른 전차소대를 후위로 배치한 다음
20시 진격준비를 마치고 출발하여 잠시 후 20시 30분에는 경부국도와 교차점인
천안삼거리에 도착하였다.

베이커 중위는 지형을 몰라 그곳 도로변에서 적병에게 ‘오산?’하며 길을 묻기도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천안으로 몰리고 있던 북괴군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미군이 통과하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면서 저항도 하지 않았다.
도로변에는 북괴군의 모터사이클과 차량들이 버려져 있었다.

베이커 전차대는 진격 도중에 발견되는 노상의 적 차량과 교량 경계병 그리고
소부대들을 그냥 놓아두고 오산을 향하여 급히 진격하였다.
이처럼 선두 전차대의 신속한 전진으로 멀리 뒤떨어지게 된 린치특수임무부대장은 첨병의 속도를 늦추도록 하려 하였으나 무선교신이 거리가 멀어 미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대대장은 1개 소대와 3.5인치 로켓포반을 차량화하여 새로이 첨병을 편성하였다.

점차 북괴군 소집단과의 교전도 심화되고 또 빈번해졌다.
이들이 오산 남쪽 16㎞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전방으로 부터 전차 및 야포의
사격소리도 들렸다.
린치 중령은 부대에 소등을 하고 전진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베이커 전차대(3대)는 대대장의 지시도 받지 못한 채 최대속도로 전진하여
오산에 돌입하였다.
오산 북방에 진출하였을 때 본대와 무선교신을 시도했지만, 교신되지 않았다.

베이커 전차대는 계속해서 오산 북방으로 진격했다.
베이커 전차대가 오산 북방 5~6㎞지점(죽미령 일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베이커 전차대를 향해 사격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베이커 중위의 전차가 돌진하는 순간 미군 전차인 M26 전차의 궤도가 눈에 띄었다.
이 순간 그의 전차에 대한 사격이 더욱 치열해졌다.
대전차 포탄이 3번 전차의 기관총좌에 맞아 비껴 나가는 바람에 전차병 1명이
전사하였다.
당시 베이커전차대는 미 제10군단의 전선으로 진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아군으로부터 소화기, 75밀리 무반동총 사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곧 전방에 배치된 미군이 사격을 중지하였다.
그것은 베이커 전차대의 과감한 돌진속도, 엔진소리, 전조등의 불빛 등으로
적의 전차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방의 한 전차장은 베이커 중위의 2번 전차를 사격하기 위해 1번 전차를
통과시키고 던진 백린수류탄이 터지는 순간에 흰별 표시(미군 표시)를 보고
아군임을 식별함으로써 가까스로 비극을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베이커 전차대는 이곳에서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7사단 제31연대와
접촉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9월 26일 22시 26분,
보은을 출발한지 장장 11시간 만에 170㎞를 달려 감격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한편, 베이커 부대와 통신이 두절된 린치부대 본대는 1시간 이상 뒤쳐져
오산 방면으로 북진 중이었다.
그런데 자정 무렵 오산 남쪽 하북리에서 린치 본대는 북괴군 전차 10대와
교전하게 되었다.

다음날(27일) 02시경 까지 진행된 이 전투에서 린치 본대는
북괴군 전차 7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린치부대도 전사 2명, 부상 28명, 전차 2대, 차량 15대의 손실을 입었다.
북괴군 전차가 사라진 후부대는 해리스 중령의 결심에 따라 그 곳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9월 27일 07시에 다시 전진을 시작한 린치부대는 08시에 오산에 진입한 후,
08시 26분에 오산북방의 작은 교량에서 제7기병연대 K중대의 맨실(Edward C.Mancil) 상사가 미 제31연대 H중대와 만나 감격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서정리>
08시 55분에 제777특수임부대로 부터 사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 한통이
전달되었다.

“임무를 완수했음. 08시 26분 제777특수임무부대의
K중대와 미 제31연대 H중대 사이의 접촉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음.”

▲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미1기병사단과 인천상륙작전 부대인 미 제7사단은 오산근방에서 합류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UN군은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다.

* 왜관 – 대전 진격전 : 9월 26일
미 제 24사단의 선제 공격제대인 제19연대의 제2대대는 이날 영동에 돌입하였으며,
즉시 형무소를 공격, 탈환한 다음, 미군포로 3명을 구출해 내고,
다시 대전 동쪽으로 16km 떨어져 있는 옥천을 향하여 계속 진격하였다.

* 진주 – 군산 진격전 : 9월 26일
이날 06시에 미 제89전차대대장 돌빈 중령이 지휘하는 돌빈 특수임무부대는
북서쪽의 함양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당시 진주-함양 도로는 적 제6사단 주력부대의 철수로였다.
돌빈 보전 특수임무부대는 제89중전차대대의 A중대와 B중대,
그리고 제35연의 B중대와 C중대를 배속받고 있었는데,
이들을 혼성하여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각 팀은 1개 전차중대와 1개 보병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차 중대장이 각 팀을 지휘하였고, 보병은 전차 위에 타고 전진하였다.

▲ 지리산 근방에서 나포한 북괴군 패잔병 게릴라. (1950. 9)

 

▲ LST 수송선을 타고 낙도로 가는 피란민들. (마산, 1950. 9)

 

9월 27일 (95일째 / D+12)

인천상륙군, 서울 대부분 탈환

* 한국 해병대 중앙청 돔에 태극기 휘날려: 제2대대 1소대, 06시
* 미 해병대, 주한 미 영사관에 성조기 게양
* 국군 수도사단 제3사단: 울진, 춘양 탈환
* 호주군 제3대대 부산 입항

서울 서측방의 미 제1해병사단은 서울 진공(進攻)작전을 재개(再開)하였다.
사단은 이날 비로소 편제상의 3개 연대를 완전 편성할 수 있었다.
우측방 제1연대는 서울 서측에서 동쪽으로 도심지역을 지나 고려대 방면으로,
제5연대는 서울 북서쪽으로 진출하여 미아리고개로,
제7연대는 사단 좌측방 개성 – 서울간 국도를 장악하여 서오릉 동쪽 고지 일대로
각각 진출하도록 하였다.

인접 미 제7사단과의 경계선은 대체로 한강인도교에서 용산까지 도로를 따라,
그리고 남산과 동대문에서는 경춘(京春)도로를 따라 정해졌다.

즉, 서울 도심 지역은 대부분 미 해병사단 전투지대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9월 27일 15시 08분, 점령한 중앙청에서 북괴군의 저항은 종식되었고
서울시 전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완료한 국군과 UN군은 28일을 기해 각부대별로
경계태세에 들어감으로써 전쟁발발 3일 만에 북괴군에게 내어준 서울은
91일 만에, 인천 상륙 후 12일 만에 다시 수복되었다.

▲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1950년 9월 26일 오후 서울시청에 돌입하여
인공기를 불태우고,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9월 27일 06시 10분 중앙청 돔에 태극기를 게양하기 위하여 해병대원이
사다리를 오르고 있으며, 돔 창문에 ‘게양’을 성공하였다.

인천상륙작전 1주일째인 9월 21일 오후 맥아더는 안양 서쪽에서 작전 중인
미해병1사단을 방문, 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가죽점퍼 속에서
은성훈장을 꺼내어 그의 가슴에 달아주면서 “빠른 시일 안에 서울에서 만나자”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숙소인 주일 미대사관에서 오랜만에 부인과 1박하는 동안 부산으로
전화를 걸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까운 장래에 각하를 서울로 모시도록 서둘러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기쁨을 안겨 주었다.

9월 22일, 미 제8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시작했는데, 25일까지는 상륙군인 미10군단과 서울 남쪽 오산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철상(slash)’과 ‘망치(hammer)작전’으로서
한반도의 적을 인천 상륙작전으로 양단 격파함으로써 북진하는 UN군이
이를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

한편, 미해병대 제1연대는 영등포로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서남으로 진입하고,
미해병대 제15연대와 한국해병대 제1대대는 일산, 수색 쪽으로 접근하며,
인천에 대기중인 미 해병대 제7연대는 북한산 경유 미아리 쪽에서 남으로
압박함으로써 서울을 9월 25일까지 점령할 계획을 했다.

그러나 서측으로 접근한 미 해병대는 당인리, 와우산, 인왕산을 연하는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공격이 늦어짐으로써, 23일까지도
서울 서대문을 돌파하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2일간의 악전고투끝에 공격기세를 회복한 한·미 해병대는 연희고지를 탈취하고
서대문으로 진격 중 9월 25일 아침 북괴군의 역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당일 저녁에 겨우 서대문 형무소를 점령했을 때,
수용되어 있던 미군 포로 4백여명은 북괴군이 도주하면서 대동 월북한 후였다.

익일 26일 9시를 기해 미 해병대 제1사단장이 서울 중심가 진격명령을 내리자,
작전구역별로 시가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배속된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새벽부터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서울 탈환은 누구보다도 한국군이 선두에서 성취해야 한다는 열망을 미 해병대
지휘관이 묵인해 준 것이다.
미 해병대 복장을 한 한국해병대 장병이 서울역으로 진격하는 동안

공산치하에서 3개월 간 신음하던 시민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호하였다.

서울역 청사 안에는 북괴군 일부가 남아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해병대원이 화염방사기로 전원을 소사시켰다.
이날 오후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는 ‘서울이 다시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다’는
성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내는 아직도 시가전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완전탈환은 못한
상태였다.

박정모 소위가 이끈 한국 해병대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는 서울시청을 점령하고
시청사 안에 걸려 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박살내었다.
그리고 시청 옥상에 휘날리던 인공기를 내려 불태우고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인근의 각국 대사관 옥상에는 계속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9월 26일이 저물어갈 무렵, 한·미 해병대가 확보한 서울시가지는 겨우 절반도
안되었으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호텔에 본부를 둔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대대장 김종기 소령이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불러놓고 다음날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기자가 “중앙청은 미해병대 제5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분부가 있었으며,
상금 3천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뜸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정모 예비역 대령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허가를 상신하였다.
대대장은 신현준 연대장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 박소위를 격려하였다.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호텔 보이를 시켜 구해놓은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
중앙청으로 접근하였다.
세종로 일대에는 군데군데 북괴군이 구축해 놓은 사낭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소탕, 제압한 다음, 2개 분대를 중앙 돔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를 근접호위케 하여 2m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2등병조를 대동하고 돔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 사다리는 폭격으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하였다.
부득이 호위 분대원들의 허리띠를 모두 회수하여 연결한 다음 천정에 매달고서
천신만고 끝에 돔 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 때가 9월 27일 새벽 6시 10분이었다.

서울이 북괴군에게 점령당한 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양병수 이등병은 이 공로로 미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상금 3천만 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태평양 전쟁시 최대의 격전지 유황도 상륙작전에서 4인의 해병이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인 아링톤 국립묘지에 있는 전쟁기념비는 미해병대의 상징이다.
서울 탈환에 앞장 선 미해병대는 곳곳에 성조기를 꽂고 승리를 기념하였으나,
국권의 상징인 중앙청만은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올리도록 아량을 베품으로써
형제 해병대의 혈맹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 중앙청 돔에 태극기를 계양한 국군 해병대 제2대대장 김종기 해군소령(해사 제1기생)

미 제1해병사단의 서울 진출

미 해병사단은 9월 25일 서울탈환에 필요한 각 연대의 전투지경선과 점령하여야
할 주요목표를 명시한 작전명령 11-50 를 하달하였다.
이 명령에 의하면 미 제1해병연대(한국 제2대대 배속)는 시가 중심부를 거쳐
미아리고개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미 제5해병연대(한국 제1대대 배속)는 중앙청을 포함한 지역을, 그리고
미 제7해병연대(한국 제5대대 배속)는 북쪽의 높은 지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미 제10군단 사령부는 서울 탈환 부대가 서쪽과 남쪽 벽을 넘어 그 일부가 시내에
이미 진입하였기 때문에, 다음 날 26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알몬드 소장은 북괴군이 속속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다는 항공정보를
입수하자, 이를 재확인하기 위하여 항공정찰을 명령하는 한편,
군단 포병으로 하여금 북으로 통하는 미아리고개와 동대문 통로에 대하여
차단사격을 집중 실시하고 공군에 대해 야간공격을 요청하기로 조치하였다.

군단장은 적의 퇴각을 확인한 후 곧 해병사단에 야간공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아군의 야간공격에 앞서 적 200여 명이 서대문형문소 방향에서 먼저
역습을 감행해 왔다.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역습을 제압하였다.
연대는 공격을 계속하여 다음 날 04시 45분까지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날 제5연대 전투지대에서만 적에게 입힌 인명손실이 1,750명에 달하였다.

전투는 26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미 제1해병연대는 전투지역을 조사한 결과 적 전차 7대와 자주포 2대를 파괴하고 5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83명의 포로를 잡았음을 확인했다.

9월 26일 04시 30분, 적의 역습은 남산의 미 제32연대 지역에도 있었다.
거의 1천여 명으로 추산되는 적의 부대가 미 제32연대 제2대대 진지를 공격하였다.
남산 정상의 제2대대는 적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으나,
장충단공원 쪽으로부터 접근하는 적에게 진지 일부가 유린되었다.
대대장은 예비대를 투입하여 2시간 격전 끝에 진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대대의 진지에는 110구, 그리고 진지 밖에서 284구의 적 시체를 확인했으며
174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날 밤 포병사격은 발사속도가 최고기록을 수립할 정도로 치열하였으므로,
포병대대장은 계속 그 속도로 포격하다가는 포신이 모두 녹아버린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뜻하지 않게 적의 역습과 연대 간에 접촉을 유지할 수 없었던
미 해병사단은 계획대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날(26일) 아침까지도 각 대대 위치는 전날 저녁과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이 무렵 적의 상황은 크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적의 사령부는 서울 서측과 남산 일대의 방어력이 약해진 것을 감지하고
서울 확보방침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적은 일부 부대로 아군의 전진을 지연시키면서 그 사이 주력부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하였다.

적의 주력부대는 영등포 지역을 방어한 제18사단이었다.
이들은 사단의 일부 부대를 남겨 놓은 채 25일 저녁 약 5,000여 명의 주력을
의정부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철수시켰다.

이날 연희고지 일대에서 시내에 돌입한 미 제5연대는 미 제1연대보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서울 북쪽 포위명령을 받은 미 제7해병연대는 개성 – 서울 국도를 따라 남진하여
미 제5연대와 연결하고 북악산을 거쳐 서울 동북쪽 미아리 고개를 향해 전진하였다.
그러나 미 제5해병연대와 연결을 위해 D중대가 독립문을 향해 전진하고 있을 때
서대문형무소 부근에서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순식간에 40명의 전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26일) 저녁까지 미 제10군단이 탈환한 지역은 서울시가의 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미 동경의 맥아더 사령관은 이날 14시 10분 서울을 탈환했다는
유엔군 성명서 제9호를 발표하였다.
즉, “한국의 수도 서울은 다시 주인의 손에 돌아왔다. 한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 그리고 미 제1해병사단을 포함한
유엔군 각 부대는 서울을 포위하고 완전히 탈환하였다”라는 내용이었다.

유엔군 총사령부의 서울탈환 성명에도 불구하고 27일 시내에서는
여전히 바리케이드를 둘러 싼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는 도심부에 가까워질수록 그 간격은 좁아져 300∼350m마다
횡단하여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포대 속에 흙을 넣어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그 전면에는 대전차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
또한 건물은 요새화되어 측후면에 대전차포와 기관총이, 옥상에 박격포 진지가
각각 설치되어 있었다.
이날 한미 해병의 전투양상은 적의 바리케이드를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전진하는 것이었다.
먼저 아군 항공기가 바리케이드에 폭격을 가한 후 전차 2∼3대가 1조로
대전차포와 자동화기를 격파하였으며,
공병부대가 박격포의 엄호 하에 접근, 지뢰를 폭파시키는 식이었다.
보병부대는 전차의 엄호를 받으면서 적을 제거해 나갔다.

바리케이드 하나에 1개 대대가 1시간 이상 지체하는 경우가 많았다.

▲ 중앙청 돔에 태극기를 계양한 국군 해병대 제2대대장 김종기 해군소령(해사 제1기생)

미 제1연대 제2대대는 마포에서 서울시가 중심부로 진격하여 프랑스 대사관을 거쳐
9월 27일 15시 37분 미국대사관에 비로소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미 제1대대는 심한 격전 끝에 오전 중 서울역을 점령하고 남대문 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도중 적의 바리케이드로부터 여러 번 저항을 받았다.
서북쪽에서 공격하고 있던 미 제5해병연대는 순조롭게 진격하였다.
제2대대는 적의 저항 없이 서대문형무소를 점령하였고,
제3대대는 서울중학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15시 08분 선두 전차부대가 광화문 사거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격파하고
한국 해병대 제2대대에 이어 중앙청을 점거하고 성조기를 올렸다.

On 27 September, the 3d Battalion, 5th Marines fought their way up the boulevard,
seized the Government House,
tore down the North Korean flag and raised the Stars and Stripes.
By dusk organized opposition had ceased. Interestingly enough,
it was some 48 hours AFTER Army General Almond had sent a communiqué reporting the recapture of the city of Seoul

▲ Marines prepare to raise the Stars and Stripes over the city

중앙청과 깃발의 비극적 역사
*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깃발이 오르는 역사는 가히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비극적이라 하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으나 그대로 일장기(日章旗)가 게양되어 있었으며,
9월 9일에 가서야 일장기를 내리고, ‘미 군정’으로 성조기(星條旗)가 올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 15일에 비로소 태극기(太極旗)가 올랐고,
6.25남침으로 1950년 6월 28일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공기(人共旗)가 올랐으며,
위 사진인 성조기가 3개월 후, 9월 27일에 다시 오르고 있습니다.
이후, UN기(旗)로 바뀌었다가,

그리고 맥아더 장군의 ‘수도이관’행사 후, 29일에야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년 후 다시 인공기가 올랐었고, 그리고 또 ···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편집자 주)

9월 28일 한·미 해병대는 서울의 잔적을 거의 소탕하게 되었으며,
익일 9월 29일 거행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하는 서울 환도식
(수복기념식) 준비를 하는 사이에, ‘수도 완전 탈환’이라는 제하의
대형활자 신문 호외가 이날 오후에 전국에 배포되었다.

▲ 1950년 9월 27일, 호주군 제3대대(3RAR) 대원들이 미국 수송선
에이컨 빅토리(Aiken Victory) 호의 갑판에서 부산항과 등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한국전쟁에서의 첫 작전들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을 출발해 대구로 이동할 예정이다.
(이들은 赫赫한 功을 세운 위대한 部隊입니다.)

 

9월 28일 (96일째 / D+13)

인천상륙부대 서울 완전 탈환

* UN군, 수도 서울 완전 탈환
* 국군 수도사단, 영월 돌입
* 국군 제6사단, 충주 탈환
* 미 제2사단, 청주 탈환
* 손양원 (孫良源) 목사 순교(殉敎), (麗水)
* 김일성, 중·소에 직접적 군사원조 요청

▲ 9월 29일 환도식 직전에 중앙청에 게양되었던, 성조기 다음에 게양되었다가 태극기에 물려 준 UN기
▲ 서울 수복을 위하여 미 해병대가 진격, 시가전 모습 (AP Photo/Max Desfor, 1950. 9. 28)
▲ 서울에 남았던 북괴군을 비롯해 체포된 사람들이 손을 들면서 연행되고 있다.
▲ 평정된 수도 거리로 국군이 입성하고있다. (고 임응식 씨 촬영, 9. 28)
▲서울에 3개월간 남겨졌던 전쟁고아, 대표적 사진 (9. 28)

손양원 목사 순교 (1950년 9월 28일)

▲ 日本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손양원 목사 (1902~1950 ) 투옥
1940년 9월 25일 밤에 순천 애양원(한센병 환자 병원)에 느닷없이
일본 형사 두 사람이 손양원 목사의 손에 수갑을 채워서 끌고 가 버렸다.
죄목은 ‘신사참배 반대

■ 3년 수감 후에, 안타까운 재수감 <종신형(終身刑 >

당시 1943년은 한참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열중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우상 숭배하는 나라 일본은 망할 것이다!’ 라고 고함을 질렀으니,
손양원 목사의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다시 재판이 열렸다.
그 재판 결과는 <종신형>이었다.

■ 6.25전쟁과 순교(殉敎)

1940년에 신사참배로 감옥에 간 손 목사는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여 5년만에
출옥하였지만,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 손동신의 친구이며 친 공산당 학생이었던 자에게 살해되었다.
*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자기의 양자(養子)로 삼으며,
그를 살려주었다.

■ 6. 25때 피난 나가기를 거부하다- 딸의 증언

손 목사님은 8.15해방 때 드디어 출옥하셔서, 6. 25가 터졌을 때까지,
애양원에서 다시 섬기고 계셨습니다.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버님의 친구들 여러 분이
애양원으로 아버님을 찾아 왔습니다.
배를 타고 같이 피난을 떠나자고 권면하였습니다.

– 중 략 –

이 사실을 직감한 애양원의 나환우들은 손양원 목사님을 붙잡아,
강제로 섬으로 피난 가는 배에 태웠고,
아버지는 그때마다 뿌리치고 배에서 내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당시에 남도의 작은 섬들은 6. 25의 참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이렇게 만들지 마시오.
나를 도리어 비겁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손 목사님은 절대 피난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1950년 9월 13일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한참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공산당들이 애양원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시던 손 목사님을 끌어내서, 손에 수갑을 채워서 끌고 가서,
여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15일 동안, 뭇매를 맞으셨습니다.

공산당을 악선전했다며…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며…
그러다가 9월 28일이었습니다.
(1950. 9. 28. 서울 수복이 있었습니다. 아마 처형하고 나서 도망치려고….
공산당은 손 목사를 끌고 여수에서 조금 떨어진 미평에 큰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으로 끌고 가서, 다른 여러 인사들과 함께 총살, 순교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48세 나이에 하나님께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 손양원 목사께서 1950년 9월 28일 순교하셨는데,
그 다음날 9월 29일,
한국 해병대가 여수에 상륙하여 북괴군과 그 부역자들을 소탕하였다.
(한국 해병대가 하루만 먼저 상륙해 주었더라면….

우리 인간적으로 봐서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왜 그를 남겨두시지 않으시고, 데려가셨을까….
이런 섭리를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가 남긴 일을 하라는 뜻이 있는가 봅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기도 했을까? 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9월 29일 (97일째 / D+14)

首都 서울 환도식 거행

* UN군, 남원. 담양 탈환 후 광주(光州)로 진격
* 국군 제3사단, 삼척 점령,
* 국군 제8사단, 단양 탈환
*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서울 귀환
* 한국 해병대, 여수(麗水) 상륙 수복

▲ ‘9. 28 서울수복’대표 사진 중앙청 광장에 다시 태극기가 한국 해병대의 손으로 게양되고 있다.
▲ 서울 환도식 모습. (중앙청 홀,1950. 9. 29)
▲ 환도식을 거행하는 중앙청 홀 모습
▲ 삼각산과 중앙청이 보인다.(미군 촬영, 파손된 서울 중심 주택지역, 1950. 9. 29 )
▲ 아주머니들이 땔감 등을 찾고있다. ( 미군 촬영, 서울 중심지역,1950. 9. 29 )

9월 29일 맥아더 원수는
서울을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 하에 넘기는 식전에서(還都式)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恩惠)로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UN기(旗) 아래서
싸우는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首都)를 해방(解放)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전제적 지배에서 해방된 시민은 다시 개인의 자유(自由)와
존엄(尊嚴)을 제일로 하는 부동(不動)의 인생관 밑에서 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기회(機會)를 얻게 되었습니다.

귀국이 입은 전쟁의 참화(慘禍)에 대하여
전 세계는 깊은 관심과 우의(友宜)로 단호히 궐기하여 전력을 다하여
귀국을 구원(救援)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육체를 살리려면 정신(精神)을 살리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국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본인은 각하에 대하여
귀국 정부의 소재지(所在地)를 회복하고, 이에 따라 각하가 헌법상(憲法上)의
책임(責任)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각하와 귀 정부 당국자가 자선과 정의(正義) 정신에 의하여
여러 난관에 대처하는 예지와 힘을 얻는 동시에
한국민이 과거의 노고(勞苦)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희망(希望)에 가득찬
새벽이 찾아올 것을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한국 국민에 관한 책임을
각하(閣下)와 귀정부(貴政府)에 맡기고 본관(本官)과 부하장병들은
다시 군무(軍務)에 전념할 각오입니다.”

■ 자료제공 / 6. 25 알리기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