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기획특집

[3.1절 특집] 독도는 한국 땅이다

▲경상북도 독도기념관 앞에서 정성구 박사

지금 우리는 일본의 신 제국주의와 전쟁 중이다.
그것은 역사전쟁이고 또한 지도전쟁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국권을 빼앗고 특히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주일예배 시간 전에 <황국신민의 맹서>,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
<천황 쪽을 향한 동방요배>를 강요한 추악한 침략자들이다.

▲ 2017년 10월 24일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독도는 한국 땅이다”라고 방송했다.

지금 우리는 일본의 신 제국주의와 전쟁 중이다. 그것은 역사전쟁이고 또한 지도전쟁이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종교개혁자 <칼빈>과 <칼빈주의사상> 그리고 <한국교회와 한국 근대사 관계 130년간>을 연구해왔다. 그리고 나는 1980년부터 총신대 총장으로서 10여 년간 일본의 동경, 오사카, 고베 등지의 신학교와 여러 모임과 기관에서 강의를 했고, 그 내용이 일본 월간지 「요군(羊群)」에 3년간 연재되기도 했고, 그 후 나의 책 두 권이 일본어로 출판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국권을 빼앗고 특히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주일예배 시간 전에 <황국신민의 맹서>,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 <천황 쪽을 향한 동방요배>를 강요한 추악한 침략자들이다. 그래서 한국장로교회의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손양원 목사(6년 옥고 후에 공산당에 의해 순교), 박관준 장로(의사) 등이 6~7년간 옥중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투쟁하다가 모진 고문으로 순교 당했고, 주남선, 한상동, 이인재, 손명복 목사 등이 6년간 옥고를 치르고 살아있는 순교자들이 되어 신앙의 순결을 지켰다.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일본 각지를 순회하면서 일본인들의 반성과 회개를 촉구했다. 이 사실을 기록한 나의 책들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대만어, 러시아어, 체코어,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포르투갈어, 벵골리안어 등 10여 개국으로 번역되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일본의 낭인 곧 사무라이들이 조선의 궁궐에 침범해서 명성황후를 20여 차례 윤간하고 일본도로 찔러 죽인 후 석유를 부어 태워 두번 죽인 반인륜적, 반인권적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다. 저들의 범죄에 대해 내가 아는 일본 친구들은 모두가 진심으로 애통했고, 눈물로 사죄했다.

예컨대, 동경에 오야마 레이지, 고베에 류조 하시모도, 우루자키 히데유키 등이다. 또 하루나 슈미토 관서 학원대학의 철학 교수, 야마쟈키 준치 목사, 마끼다 교장, 요시오 슈미즈, 다무라 이찌로 목사이다. 또 나는 한 일본 청년 목사를 30년 전에 한국으로 초청해서 내가 직접 3년간 장학금을 주어 한국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그는 지금은 서울에 머물면서 한·일간의 가교를 위해 28년간 크게 일하는 미와 노부오씨이다. 그동안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거짓말했다.

일본 교과서에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 주장하고 심지어 초, 중, 고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에서 다케시마(독도)를 불법 점령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답안을 쓰도록 유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와 여러 독도 연구소 등에서 이에 대해서 반발했고, 초등학교에서부터 지방 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를 부르고 항의성 집회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침략자이자 패전국인 일본은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다시 한국을 점령하려 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일본제국주의 정신을 가르치고 선동하고,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 정부나 한국인들은 독도문제를 매우 즉흥적, 감정적, 감성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몇몇 침략 문서와 1905년 이후 침략 지도 등을 근거로 매우 치밀하고 비양심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신 제국주의 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우리도 논리는 논리로, 자료는 자료로 대항하고 철저히 준비해서, 침략자 일본제국주의와 우익 지도자들에게 확실하게 경고하고 저들의 침략 야욕을 완전히 꺾어야 한다.

나는 오늘의 현실을 보다 못해서 내가 소유한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60여 종의 한·일 서양 고지도(영, 미, 독, 불, 화)를 공개해서 일본의 침략야욕을 꺾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1876년 강화도 조규(한문, 일문, 영문, 중국 상해판, 1896) 제7조에 벌써 일본은 침략의 발톱을 드러내어 일본군함이 조선의 모든 섬과 암초를 측량해서 그 위치와 깊고 얕은 정도를 기준으로 그림과 기록으로 만들어 일본군함이 조선에 자유로이 항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조항을 만들었다. 이는 조선 침략과 식민지를 위한 계획된 포석이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05년 일본은 <일사늑약>을 통해 한국을 불법 강점하고, 1905년 이후의 모든 일본과 한국 지도의 일본 본토의 색깔과 꼭 같이했다. 그들은 조선 점령을 메뉴얼대로 수행했다.

그러므로 1900년 이후 일본이 만든 한·일의 지도는 한국을 식민지화 하고 지도의 색깔을 바꾸었으니 아무 가치가 없는 침략자들의 지도에 불과하다. 나는 1600년대에서부터 1900년도 이전의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화란, 러시아에서 발행한 원본 한·일 고지도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기록된 곳은 단 한곳도 없다. 도리어 1800년대 지도에는 <대마도가 한국 땅>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도가 더 많다.

나는 평생, 학문의 전쟁은 자료전쟁이며 외교전쟁도 정보전쟁이요, 자료전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한국 칼빈주의연구원과 칼빈박물관에 소장된 자료들을 개방해서 일본의 새로운 침략 전쟁에 대처하려고 한다. 물론 일본에도 양심적인 분들이 많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복음으로 깨우쳐야 된다고 본다. 일본은 우리의 선교지이다.

나는 독도 연구자가 아니고 칼빈 신학자이자, 칼빈주의자이며 교수요, 목사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에 나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우리나라를 깨우고 일본의 허위와 거짓을 고발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하여 서양의 고지도 발표를 자청한다.

33년 전에 세운 우리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60여종의 서양 고지도 자료 중에 우선 10여종의 지도를 언론에 공개하고자 한다. 나는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이기를 기도한다.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

① 우리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 한국외교부의 여섯 가지 반론을 적극 지지하며, 그 동안의 독도 연구가들의 의견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독도 문제에 관한한 확실한 자료 증거 제시를 해서 일본이 더 이상 도전할 수 없도록 민족 자존심을 살리고 대동단결하자.

②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국제적으로, 대마도가 과거에는 한국영토임이 증명된 것인 만큼, 더욱 논리적으로 증거확보를 하고 어떤 경로로 일본이 대마도를 실효지배하게 됐는지를 역사적으로 철저히 조사해서,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아야겠다. 일찍이 평생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국제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일본에게 두 번이나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호통 쳤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이 논의는 더 발전하지 못했다.

③ 정부는 더욱 치밀하고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과학적 논리로 우리의 입장을 주장해서 일본 제국주의자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자.

④ 우리는 플래시몹도 해야 하고, 독도 노래도 불러야 하지만 진정한 애국심이나 논리적 대응 없이 놀이나 노래로써 즐기는 수준은 지양했으면 한다.

⑤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 독도를 일본영토로 슬쩍 편입한 일본의 주장은 양심을 버리고 침략의 발톱을 숨긴 사기다. 이런 양심불량의 일본정부는 오늘처럼 광명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으로 부끄러운 처사이다.

⑥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더욱 당당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들은 과거 못된 전쟁범이자 침략자였고, 우리는 침략을 당한 나라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6년간 쌀을 비롯한 곡식을 모두 수탈하고, 독도의 강치를 비롯해서 풍부한 해산물을 몽땅 잡아 간 불량국가이므로, 일본이 한국과 세계 등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를 사과 받아야 한다. 아직도 일본의 우경화 정권이 이끄는 대로 신 제국주의 망상에 빠져 이웃 국가인 한국을 넘본다면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과거, 침략자로서 한국인을 전쟁터로, 탄광으로, 정신대로 몰고 간 일을 진심으로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회개가 무슨 뜻이지 모르겠지만…)

⑦ 「한국 칼빈주의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의 자료들은(지도에 관해서만) 관심 있는 독도연구 기관과 개인에게 자유로이 개방하겠다. 어려운 때일수록 정보의 공유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 칼빈박물관 관장, 전 총신대 총장, 명예교수, 총회역사 박물관 명예 관장
정성구 박사
(010-9384-0777, 031-709-3601 / skc0727@yahoo.com)
성남시 분당구 분당로 381번길 13 (분당동 121-9)


참고 1

A. 한국자료에서 독도의 이름들
1. 于山島(우산도)
2. 三峯島(삼봉도)
3. 可支島(가지도)
4. 石島(석도)
5. 독섬
6. 松島(송도)

B. 서양지도에서 부르는 독도의 이름들
1. 리앙쿠르트(Liangaurt), 1791년 불란서 탐험대 발견
2. 호네트(Hornet), 영국 상선 발견
3. 알고노트(Argonout), 1787년 불란서 탐험대 발견

C. 울릉도와 제주도
1. 서양지도에서 울릉도는 다게렛(Dagelet) 이라함
2. 서양지도에서 제주도는 쿠엘파트(Quelpart, Quelpaert) 라함. 화란사람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이 발견해서 붙인 이름


참고 2

광화도 조규 7조(1876)

조선국 연해의 도서 및 암초에 대하여 종전에는 조사해 놓은 것이 전무하므로 모두 극히 위험하였다.
이에 일본국의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그 위치와 깊고 얕은 정도를 기준으로 삼기 위하여 그림과 기록으로 엮어서 양국의 선객들이 위험을 피할 수 있고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다.

▲ 광화도 조규 7조(1876)

증거 1

▲1586년 세계지도 당시 한국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고, 한반도가 약간의 돌출부로 표시 됨.

증거 2

▲ 1626년 Kingdom of China(중국왕국) 한국은 반도로 표시되었고, 오늘의 동해는 <중국해>로 표시 됨

증거 3

▲ 1763년 한국지도에는 오늘의 동해를 <한국해>로 표시

증거 4

▲ 이 지도는 1809년 3월 1일 시를(Ceri)l과 데이비스(Davis)등 3명에 의해서 제작된 핑켈톤 현대 지도(Pinkerton Modern Map)이다. 울릉도와 독도가 지금의 한국 강원도 쪽 가장 가까이 표시되었다.
울릉도를 유사한 한국 발음으로 ‘Kulung Tao(쿨릉도)’라 했다. 독도는 옛 조선 명칭인 <삼봉도>를 유사한 발음으로 ‘TChamdou Tao’라고 썼다.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령이란 뜻이다. 반면에 일본 섬들은 모두 시마(Shima)로 표기되었다. 항공촬영이 없던 때이지만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땅인 것을 확실하게 강조한 지도이다.
▲1809년 지도

증거 5

▲ 1815년의 한국과 일본의 상세 지도이다. 울릉도의 표기는 ‘Dagelete’, 독도의 표기는’L’angaurt’이다.
1815년 8월 16일 톰슨의 새로운 일반지도(Thomson’s New General Maps)로 이다. 오늘의 한국 강원도의 가장 가까이 두섬이 있으나 <울릉도>와 <독도>가 중복된 듯 모두 한글발음으로 ‘Tao(도)’라 표기되었다.

증거 6

▲ 1850년 (중국지도) 영국의 에딘버러 존 톰슨(John Thomson)에 의해 제작됨. 울릉도(Dagelete)와 독도(Liangaurt) 가확실히 표기됨.
▲1854년 (중국지도) 미국, 펜실베니아 (Thomas Cawperthairt)에 의해 제작 됨. 울릉도(Dagelete)와 독도(Argonout)가 한국령임이 확실히 그려져 있다.

증거 7

▲1851년 존 테일러(John Tallis)가 제작한 <한국과 일본지도>.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 출판된 대마도는 분명히 한국해협 안에 있으면서 일본영토로 색깔로 입혀졌으나 울릉도는 ‘Dagelete로’, 독도는 ‘Argonaut’로 표시되었고 독도는 확실히 한국영토임이 확인 되었다.

증거 8

▲1850년 <일본, 한국, 중국지도> 영국 런던의 벌츄(J. S. Virtue)에 의해 제작됨. 울릉도(Dagelete) 독도(Hornet)로 표시됨.
이 지도에서 압록강 훨씬 위에 오늘의 중국 연길까지 한국땅으로 그려져 있다.

증거 9

▲1850년 일본, 한국, 중국<런던, 더블린, 에딘버러> 비틀리뮤(J. Bartholimew)에 의해서 제작됨. 울릉도(Dagelete)와 독도(Argonaut)가 한국령으로 분명하고 압록강 위쪽의 넓은 지역, 오늘의 중국 연길이 한국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증거 10

▲ 1864년 <일본지도> 존슨(A. J. Johnson)이 제작하고 미국 뉴욕에서 출판, 울릉도는 ‘Dagelete’와 ‘Matousima’로 병기.
독도는 ‘Takesima’와 ‘Liangourt’로 병기, 대마도는 한국 땅으로 되어있다.

증거 11

▲ 1880년, 독일의 일본, 한국, 동중국 <Steless Hand>지도 바리치(Barich)에 의해서 제작.
‘Korea’와 조선(Tchoson)을 병기. 독도를 ‘Liangaunt’와 ‘Hornet’를 병기함.

증거 12

▲ 1850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 <일본과 한국>, 울릉도(Dagelete), 독도(Argonout) 그리고 대마도를 한국 땅으로 표기됨.

증거 12

▲1900년 일본지도 영국 런던의 블랑슈(Blachie) 부자(父子) 제작, 독도(Hornet), 울릉도(Dagelete), 독도(Liangaunt) ,독도를 두 개의 다른 섬으로 이해함.

증거 14

▲ 1840년 일본지도 <영국, 런던>구츨리 맵셀러 <Guchley Mapseller>에서 출판.
울릉도(Dagelete), 독도(Argonout) 그리고 대마도도 한국 땅에 속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동해보다 한국해가 맞다

정성구 교수의 글이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일본의 요군(羊群)지에 연재되면서 한국지도를 그렸는데 일본해가 아니고 동해로 표기했다. 그러나 동해보다는 한국해가 올바른 표기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1723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지도에 우리가 말하는 동해는 <한국해, Mer de Corée>라고 했고, 1763년 지도와 1700년도 아시 아지도에도 <한국해> 라고 했다.


2005년 3월 15일

“독도 영유권 日 생떼 사죄”

日 기독교 ‘화해사절단’ 대신大 방문 특강
개혁파 목사·성도 8명 일제 만행 참회

“독도는 맹백한 한국 땅입니다. 일본의 약탈 야욕에 대해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이름)의 날” 재정문제 한·일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화해사절단(WAO)’이 10일 경북 경산시 대신대학교를 방문, 일본의 악행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교회의 우르시자키 히데야기 담임목사와 WAO(We Are One)선교회 미션 단장인 이르즈키 히데야기 목사 등 일본 개혁파 교회 목사와 성도 8명은 이날 오전 대신대(총장 정성구 목사) 대강당에서 열린 특강에 앞서 “일본인으로서 일제의 만행에 대해 깊이 참회하며 한국의 슬픈 역사와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방문 목적을 밝혔다.
광복 6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날 행사는 교수와 학생을 비롯해 시민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국민의 용서를 구하는 사절단의 ‘묵상기도’로 시작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가 끝나자 이들은 차례로 강단에 나와 일본의 만행에 대해 사죄하는 내용을 담은 특강을 이어나갔다.
사절단의 단장 이리즈키 히데야기 목사는 “과거 숱한 만행으로도 모자라 독도 문제로 아직까지 한국인을 괴롭히는 일본은 정녕 악의 노예인가”라며 “악행을 반복하고 있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 일본의 양심 있는 지성인을 대신해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이어 30여 차례나 한국을 방문했다는 우르시자키 히데유키 목사도 특강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이 어떠한 약탈 노력을 하든 간에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며 “독도문제 등 최근 일본에서 새로이 일고 있는 일련의 제국주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의식있는 한·일 민간인들의 화해와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정신대와 강제노동 보상운동, 천황재의 허구성 등을 폭로하는 데 앞장서 온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이다. 특히 히데야기 목사는 2차 대전 말 어린 소녀들을 정신대와 보국대원으로 강제동원했던 기계회사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소송에 앞장선 인물로 알려졌다.
이날 일본 기독교인들의 용기 있는 양심선언을 지켜본 이강수(31·대신대 2년)씨는 “용서를 구하는 일본인들의 용기는 포용하고 싶지만 독도문제에 대해서만은 우리 정부가 초강경 대책을 마련해 우리 영토를 끝까지 지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위안부 기사

▲ 위안부 기사(일본어

「일본육군이 개설한 종군위안소」

근대국가 중에 군대가 전장에까지 위안부를 동반하는 것은 일본군뿐이다. 군부 역시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고급장교도 군의관도 개인적으로는 종군위안소 촬영을 금지하여, 신문, 카메라맨의 작품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종군위안부의 시작은 소화 13년 1월 13일(서기1938년)이나 14일로 확실한 날짜는 불분명하다. 다만 제1호 위안소의 장소는 상해의 양가택(楊家宅, 요우까타구)에서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일본군 병참사령부는 곧바로 그 곳에서 매춘소를 직할로 개업하였다. 그리하여 상해 항주만에 상륙한 일본장병들이 강간과 약탈을 한것은 남경에 진격하기 위해서다. 항주만에 상륙한 제십군(十軍) 역시 매일 전투를 반복하여 1개월에 300km를 달려서 남경에 도달한 그 비밀을 상상할 수 있다.

「일본군이 지나간 곳은 처녀가 없다.」는 말이 있다. 무슨 까닭인가? 동경재판에서 한사람의 여성이 일본병사 30인에게 윤간당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어찌되었건 상해나 남경 전선의 증언을 통해서다.

그 사실은 상해나 남경의 외교기관에 통보되어 우선 외국기자의 손으로 해외로 타전되었다. 일본군 최고간부는 우선 그것에 놀랄 뿐이다. 군의 위신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 이외도 폭행도 겹쳐서 장군 중에 성병이 만연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점령 후의 치안유지, 이를테면 민심의 이반도 걱정이다. 이런 일로 군 최고간부는 몹시 흥분한 장병을 군당국이 달래면서 청결한 매춘부를 관리하므로 진정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종군위안부이다.

위안부 여성모집은 처음엔 군에서 자금을 모아서 어용상인을 앞에 세웠다. 1인 1,000엔의 선불이다. 이 돈을 반환할 시에는 자유롭게 경영하는 시스템이다. 요금은 1회 2엔으로, 500인을 상대하면 자유롭게 운영되었다. 남경 공략 직후부터 시작해서 위안소(종군위안부)가 각지에 차차 세워져 일본군이 있는 곳은 반드시 위안소가 있었다.

소화 13년 4월에 군직영은 체면상 전부 어용 상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검진과 관리는 전부 군이 담당하였다. 이런 일본군대의 종군위안부 일은 일본내지에서는 비밀로 하여 그녀들의 존재도 모르고 기사도 사진도 전부 검열로 정지되고 허가하지 않았다.

그녀들 태반은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여성으로 알고 있었고 전후 20년동안 운영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전쟁 중 검열덕이다.

그녀들 중에서 중국 운남성, 등월, 망시(芒市)에도 있었던 것 같다. 군도 함께 옥쇄 신념, 즉 일본의 철저한 국가지상주의에 목숨을 버리는 자도 있고 옥쇄부대(玉碎部隊) 이름도 그녀들은 알 수 없었다.

패전 후 종군위안부들 대부분은 현지에서 쓰레기 같이 버려졌다. 그중에 군막사 주변에서 아기를 업고 방황하는 애처로운 조선 여성도 있었다. 동남아시아에는 지금 나이든 여인들 중에는 본래 종군위안부로서 접시나 구두를 닦는 것도 보였다. 종군 위안부는 각 부대에 40명씩 배속되어 총수는 80,000여 명이나 되었다.

일억인의 昭和史<10> 不許可寫真史 (1977) pp. 62-64. (일본매일신문사 보고)


3.1절 만세운동에 관한 기사

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1919년 2월 6일자 매일신문에 전국 각지에서 일본 통치에 항거하는 운동이 있었다는 보도내용이다.
아래) 1919년 2월 26일자 매일신문에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일본의 침략을 성토하는 대대적 대회가 있었다는 보도내용이다

3.1운동사

3.1운동사(좌)와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의 명단(우)
이들은 3.1 만세운동 당시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