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오피니언

[연재]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의 역사적 배경 ④

(지난호에 이어) 코메니우스가 생각했던 하나님이 맡기신 신앙의 보화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교회의 훈육’, 그리고 ‘교회연합의 정신’ 등이었다. 다시 설명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이미 15세기 초엽에 진리의 순교자 요한 후스가 심어준 복음의 정신이었다. 코메니우스는 후스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친구로 불렀다. 이것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의 본질이 얼마나 후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48)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역시 로마가톨릭교회를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어머니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자기 자녀의 피를 빨아먹는 호랑이이자, 변모한 계모에다 비유하여 언급하였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우상을 좇았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그들 세력과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해명하였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정절을 버린 신실하지 않는 어머니, 부정한 아내로 언급하였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것을 특히 계시록 17장16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경고하였던 것이다. 49)

두 번째 형제연합교회의 귀중한 신앙의 보화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도록 해 주는 교회의 훈육을 들었다. 신앙이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훈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일찍이 루터가 말한 칭의론의 남용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즉, 가톨릭교회의 행위구원에 대한 반대를 위하여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 얻음(칭의론)을 강조하였지만, 이웃을 향한 사랑의 계명이 삶에서 믿음의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음 것임을 또한 잘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가 줄기차게 실천해 왔던‘훈육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교회의 훈육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형제단교회와 칼빈파교회는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또한 인정하였다. 그러나 칼빈주의 자들이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에 속한 것들을 너무 많이 추측하여 해석함으로써 재세례파, 소니언파, 알미니안파 등 그밖에 많은 해충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칼빈파 교회는 단순하고, 덜 사변적이며, 하나님의 깊은 비밀한 경륜에 대하여는 더 겸손히 말해야 할 것을 충고하였다. 50)

세 번째 코메니우스가 언급한 형제연합교회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보화는 교회연합의 정신이었다. 라틴어로 ‘우니타스 프라트룸’(Unitas fratrum)은 ‘형제연합’이란 말로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의 연합을 전제한 지(支)교회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 나누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교회에 속한 지(支)교회들인 셈이다. 코메니우스는 바로 이러한 형제연합교회의 정신 아래서 자랐기 때문에 루터파교회와 칼빈파교회는 형제연합교회의 자매교회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51)

코메니우스는 감독직을 내려놓고, 그의 형제연합교회를 해산하는 위기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어떤 절망이나, 체념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는 계속해서 그가 구상하고 있던 탁월한 ‘범지혜적인 작업’(Opera Pansophiae)을 서두르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리고 그의 형제연합교회를 이끌 수 없었다면, 그는 이제 전 인류를 향하여 그들을 섬기기를 원하며, 더 좋은 미래를 준비하도록 돕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52)

1656년 리사에 머물러 있는 동안 코메니우스는 다시금 일어난 전쟁으로 인하여 도시가 불타게 되고, 그의 집과 그의 도서실과 그가 수십 년 동안 수고하여 만들었던 많은 손으로 작성한 원고들이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그때에 그의 옛 화란의 후견자였던 더 기어(de Geer)의 아들인 ‘라우렌티우스’(Laurentius)가 노인인 된 코메니우스와 그의 가족을 화란으로 초청하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그가 암스테르담에 마련해 준 집에서 인생의 노년기를 보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그는 1657~1658년에 그의 기념비적 출판물인 ‘교수학대전집’(Opera didactica omnia)을 출판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14년을 더 살다가 1670년 11월 15일 7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암스데르담에 있는 나아르덴의 개혁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53)

코메니우스는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 글이 1667년에 출판한 ‘평화의 천사’(Angelus Pacis)와 1668년에 출판한 ‘꼭 필요한 한 가지’(Unum necessariun)라는 소책자이다. 전자는 화란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임박했을 때, 형제연합교회의 노 감독이 그들 양국의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 화해조정자로 추천되어 대표연설을 하였는데, 그 연설 중에 평화를 호소했던 원고 내용이다. 즉 코메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양편을 향하여 전쟁 대신 평화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논쟁의 원인은 무역해상로인 바다를 서로 차지하려는 주장 때문이었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연설에서 바다는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암시하였다(시95:5). 그리고 식민정책에 대한 질문을 거론하였다.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봉사해야 하며, 유럽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자신들의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파된 말씀을 지지하기 위하여 먼저 스스로 평화 가운데서 사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경배되는 곳에서는 모든 불화와 논쟁이 제거되어야 하며, 특히 교회들 아래에서 더욱 그러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 그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불타는 진노를 초래하게 될 것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꼭 필요한 한 가지’란 글에서도 비슷한 감독의 말이 나타난다. 즉 이 글은 팔츠의 겨울왕 프리드리히(Friedrich)의 아들 루프레히트(Ruprecht)에게 봉헌한 것이다. 인간은 그의 행운을 세상에서 헛되이 찾으려 하지만, 거기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을 찾는다면, 거기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성경 안에서 우리를 보존되게 해 주는 것처럼, 그의 살아 있는 말씀은 모든 인간적인 지혜보다 더하며, 모든 신학보다 더하다고 하였다. 그의 계명은 모든 인간적인 법 위에 높이 서 있는 은혜이다. 코메니우스는 그 책의 마지막에 “나의 전 삶은 순례자의 배회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나는 거주지를 항상 바꾸어야 했고, 나는 그 어디에서도 항상 고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나의 하늘의 고향을 바라본다.”54) 라고 써 놓았다.

6. 코메니우스 이후의 형제연합교회의 유산과 오늘

코메니우스가 죽고 난 이후, 유감스럽게도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직은 그 누구에게도 계승되지 못했다. 실제로 형제연합교회는 유럽 전역으로 흩어진 주님의 백성으로 디아스포라의 주인공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1700년경에는 폴란드 리사(Lisa)에서마저도 형제연합교회의 예배들은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폴란드 지역에 그 형제연합교회 지체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그러나 폴란드 지역의 가톨릭교회의 현저한 박해로 인하여, 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그리고 폴란드 지역의 형제연합교회의 장로(감독)로는 1699~1741년까지 그 당시 베를린의 왕궁설교가로 활동하였던, 코메니우스의 외손자인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Daniel Ernst Jablon ski)가 이어받았다. 1768년에 이르러 종교의 자유가 폴란드에서 인정된 이후에, 그 당시 폴란드에 약 10개의 형제연합교회에 속한 지(支) 교회들이 있었으며, 이들 교회는 모두 폴란드 말과 독일 말을 사용하는 교회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앙고백으로는 개혁파교회(칼빈파)의 신앙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옛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을 견지하기도 하였는데, 평생직인 장로 선출이라든가, 16세기의 것을 계승하고 있는 감독의 목사직 안수 등이 시행되는 일들에서였던 것이다. 55)

헝가리에서 1671년 종교박해가 진행되던 동안에 마지막 남았던 형제연합교회들은 모두 붕괴되었다. 그 가운데 흩어진 형제들은 슬로바키아 백성들 가운데 더 많이 확산되었던 루터파교회에 속하거나, 또는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인 북쪽 헝가리 지역에 특히 모라비아 국경선을 따라 정착했거나, 헝가리에 있는 개혁파교회에 속하여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56) 그리고 보헤미아-모라비아 지역에서는 30년 종교전쟁 이래로 암흑의 시대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러한 어두운 암흑기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모라비아 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이었던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의 영향 하에서 ‘복음의 숨겨진 씨앗’들로 불리는 이들이 곳곳에 흩어져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씨앗들’에서처럼, 새로운 형제연합교회의 생명은 외국으로 망명한 자들에 의한 교회공동체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특히, 독일 루터파 경건주의 운동의 본산지인 할레(Halle)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던 필립 야콥 스페너(Ph.J.Spener)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H. Francke) 등은 코메니우스의 글(문서)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57) 그들은 코메니우스의 문서를 통하여 그들 신앙운동의 선행자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미 굳어진 독일프로테스탄트의 루터정통주의교회에 대립하여 옛 형제연합의 신앙모범을 따라 그들의 영적인 돌봄에 대한 위대한 가치를 다시 붙잡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설교들은 신학적인 논쟁 없이 전적으로 교회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졌고, 신학공부는 지역교회에서 목사후보자들의 미래적인 목회실천행위에서 시행되는 방향으로 정착되었다. 즉 신학공부는 그 목적이 교회를 위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공적인 주일예배 외에 빈번히 작은 성경공부모임이 이루어졌고, 가정기도회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앙교리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한 사색은 가능한 멀리하게 하고, 일상의 삶에서 신앙의 더 많은 결실(경험)들이 나타나게 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임재가 경험되도록 하는 일들이 강조되었다. 거기에는 세상에 대한 금욕적인 형태의 폐쇄적인 신앙적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웃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적인 책임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의식이 자라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선교(복음전도)에 대한 의무감이 강하게 강조되었던 모습에서 확인된다. 58)

이러한 새로운 신앙적인 모습은 모라비아 동쪽지역에서 일어난 형제연합교회의 후손들에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독일 국적을 가진 자들로서 가톨릭으로부터 개종한 자들이었다. 후에 크리스천 다비드(Zimmermann Christian David)라는 인물이 1722년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백작에게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개종자들이 백작의 땅인 ‘헤른후트’(Herrnhut)로 이주하여 거기서 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 요청을 진젠도르프가 기꺼이 수용하여 허락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모라비아의 신앙인들이 대거 헤른후트로 이주해 오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알려진 대로 그들 가운데 얼마는 이전에 코메니우스가 풀넥(Fulneck)에서 목회할 때, 함께 했던 그 형제연합교회의 후손들이었다.59) 그 때문에 옛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은 그들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헤른후트(Hernnhut)가 하나의 새로운 형제교회로 형성되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 당시 분위기에서 그들은 특히 모라비아 동편지역의 라이토미슐(Leitomischl)이란 곳에서 계속적으로 이주해 오는 자들을 도우게 되었으며, 헤른후트의 신앙공동체는 점점 더 큰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진젠도르프는 거대한 선교적이며 교회연합의 목표를 가지고, 헤른후트의 형제교회가 그 지역 ‘루터파교회’(Landeskirche)의 지체로 동화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라비아 인들은 다른 이주자들과 합세하여 계속적으로 그들 이전의 모라비아-형제연합교회와 연결된 비슷한 교회를 형성시켜, 역사를 이어가려고 했는데, 마침내 그들 자체의 교회법과 감독을 가진 자립적인 교회조직체로의 발전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거기서 옛 형제연합교회가 지니고 있었던 신앙적인 모범과 신학적인 특성에 따라 그들 교회와 교회지체들의 삶을 보호해야 하는 평신도 장로의 직무가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교회훈육이 도입되었고, 형제연합교회가 수년 동안 통상적으로 박해의 시대에도 한 번도 변경하지 않고 유지했던 간단한 형식을 갖춘 그 예배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형제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경건의 형태들이 진젠도르프와 독일 경건주의적인 영향 아래에서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헤른후트 교회에 새로운 경건의 형태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60)

이제 형제교회(Bruedergemeinde)는 영국에서도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현저히 모라비아에 뿌리를 둔 새로운 이주자들의 모습과 함께 통상 모라비안 형제들로 불리게 된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면서 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사도직의 계승으로 이해된 감독직이 큰 인상을 남기게 되는데, 폴란드의 형제연합교회의 장로는 다니엘 에른스트 야불론스키(Daniel Ernst Jablonsky)가 안수를 받고, 감독직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1735년에는 차우크텔러(Zauchteler)에서 이주해 온, 뉘츠만(David Nitschmann)이 또한 감독이 되었으며, 그 후에는 2년간 진젠도르프 백작이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새로워진 형제교회는 이웃 사랑과 어린이 교육과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역시 용감한 증언자의 의무를 수행하는 봉사활동을 지속하였고, 그들은 역시 이러한 실천적인 기독교의 모습에다 큰 가치를 두고 있었었던 것이다.
그 이래로 헤른후트의 형제교회는 수십 년간 전 세계를 향한 해외선교에 열중하게 된다.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이미 그 시대에 그의 글들을 통하여 해외선교에 대한 길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교정신이 진젠도르프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가난한 이방인들을 돕는 선교를 헤른후트의 진젠도르프 신앙앙공동체는 지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처음으로 세계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이 헤른후트의 진젠도르프신앙공동체가 행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작업의 주된 부분을 특히 모라비아에서 탈출해 온 형제들이 감당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벌써 1733년에 크리스천 다비드는 그린란드(Groenland)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같은 시기에 후에 감독이 되었던 다비드 니취만도 덴마크의 서인도에 있는 성 토마스 섬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어 갔다. 그 후에 진제도르프의 신앙공동체인 형제교회는 선교지역을 점점 더 확대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 지역의 자마이카, 수리남 등 여러 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1734년에는 북아메리카 지역인 조지아주와 펜실바니아 등에 선교 과제 실현과 결부된 식민정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다비드 니취만(D.Nitschmann)은 풀넥의 차크텔에서 이주해 형제로 선교열정을 그 자녀들이 이어받아, 북미지역의 인디안 선교에도 크게 헌신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적인 선교 역사에서 칼 파칼트(Karl Pa’calt)는 출생이 체코인으로 불렸던 사람으로, 남아프리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가 활동했던 지역에다 ‘파칼도르프’(Pacaldorp)란 마을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61)

1735년 다비드 니취만이 그의 형제와 가족으로 구성된 선교단체를 이끌고 북미지역으로 항해할 때, 후에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이(John Wesley)가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었으며, 그들 모라비아형제들의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웨슬레이는 모라비안 형제들이 항해 동안에 바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믿음의 용기와 겸손함을 견지하고 있는 그들 신앙태도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일로 웨슬레이는 이들 모라비안 형제들과 계속 교제하였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형제교회와 연결하여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역시 독일의 헤른후트 형제교회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1738년의 그의 회심은 이러한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웨슬레이가 영국에서 일으켰던 신앙부흥운동은 처음부터 모리비아 인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웨슬레이는 이러한 모리비아 형제들에게 힘입고 있었던 점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감리교도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헤른후터의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 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62)

헤른후터(Herrnhutter)의 형제공동체는 주로 독일경건주의 반열에 합류하여 성장하였고, 1870년에 북서보헤미아(Nordwestboehmen)에서 몇 개의 지(支)교회들과 새로운 체코의 지 교회를 세울 수가 있게 된다. 이주자들의 다수는 보헤미아의 출신들로 독일의 주(州)교회(Landeskirche)에 연결되었다. 보헤미아-모라비아로부터 이주해 온 많은 사람들이 헤른후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헨너스마을(Gross-Hennersdorf)과 게어락스하임(Gerlachsheim)으로 옮겼고, 후에 큰 무리가 1733과 1734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였거나, 가까운 이웃도시였던 릭스도르프(Rixdorf)로 옮겨가 거주하게 되었다. 릭스도르프(Rixdorf)는 베를린 남부 지역인 노이쾰른 지역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로 오늘날도 200가정 이상의 형제연합교회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1992년 코메니우스 탄생 400주년의 해에 베를린 시가 그 지역에 코메니우스를 기념하는 동산’(코메니우스 가르텐, Comenius Garten)을 세우도록 땅을 기증하였고, 코메니우스 기념관과 동상이 지금 그 곳에 세워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긴 역사로 연결된 디아스포라의 환경에서도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은 어떤 요소들은 반종교개혁적인 가톨릭주의를 더 강하게 기억했던 루터적인 것에서보다 칼빈주의적인 개혁교회의 형태에 더 가깝게 머물러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781년 10월 13일은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보헤미아를 통치하던 요셉 2세의 황제는 마침내 합스부르그 군주국 전 지역의 비 가톨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는 관용의 칙령(Tolerance patent)을 발표하게 된다. 이것은 실제로 30년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던 이래로 약 160년간의 극심한 종교박해의 암흑시대를 마감하는 일이었고, 마침내 보헤미아-모라비아지역의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 형제연합교회의 조상들이 사용했던 신앙고백은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다만 루터의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과 스위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두 가지 밖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후스파와 형제연합교회의 후예들은 여전히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황에 적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대체로 루터의 것보다는 스위스개혁교회의 신조를 따르는 방향에서 종교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체코 전역에는 약 80,000여 명의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루터의 신앙고백을 따르는 19,000명, 스위스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르는 수가 59,000명 모두 78,000명의 체코의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정식으로 등록되었던 것이다. 1787년에는 76개의 지역교회가 설립되었고, 53개의 교회학교가 또한 존재하게 되었다.

1861년에 이르러 역시 프란띠쉑 황제 요셉1세는 보헤미아(체코) 프로테스탄트 신도를 위한 칙령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하는 명실 공히 종교자유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칙령에 따라 체코의 민족의식은 고조되었고, 후스파와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은 회복되는 게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1918년에 10월 28일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설립으로 종교의 자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 때 신앙고백의 선택에 따라 2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진 체코의 프로테스탄트는 루터파와 개혁교회였는데, 이제 체코의 종교개혁 전통을 토대로 하여 하나의 연합된 개혁교회(형제연합교회중심)가 탄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1918년 12월에 프라하에서 체코의 개혁교회가 총회를 개최하면서 이루어졌다. 당시에 개혁교회에 속한 신도수는 126,000명이었고, 루터교회는 34,000명이었다. 체코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인, 형제연합교회의 중심으로 ‘보헤미아 개신교형제교회’(Evangelische Boeh- mische Bruederkirche)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연합된 교회의 상징인 ‘로고’는 성경 위에 놓여 있는 성배(성찬의 잔)의 그림 깃발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체코 국민은 대거 로마가톨릭교회를 탈퇴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약 18%에 달하는 국민, 100,000명이 보헤미아의 개신교형제교회에 가입하여 총 250,000명의 신자를 가진 큰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1919년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프라하에 ‘후스개신교신학부’가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1953년에 이르러 다시 ‘코메니우스개신교 신학부’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그러나 후스개신교신학부를 고수하는 이들에 의하여 지난 9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개신교신학부’(Die Fakultaet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로 다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구소련의 공산주의 사상의 지배로 동구의 나라들과 함께 공산권에 속하여 있었다. 그 때문에 ‘보헤미아개신교형제교회’(Evangelische Boeh- mische Bruederkirche)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종교의 자유가 다시 억압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제주의적인 사회주의 사상의 통치 하에서 보헤미아의 개신교형제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영향을 미쳤던 소비에트연방의 통치자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의 정책으로 인하여, 1989년 11월 소위 민주화를 요구하는 벨벳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1948년 공산당이 점령한 후, 약 41년 만에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공산당 정권은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 정부체제를 가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1992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하나의 나라로 있었으나, 이 때 평화스럽게 양국가로 독립하게 되었으며, 교회 또한 국가에 따라 평화스럽게 각각의 개신교회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개신교회는 그들 교회의 신앙의 선조인 코메니우스를 존경하는 인물임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교육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프라하에 국립 코메니우스교육박물관이 오래 전에 설립되어 있으며, 또한 코메니우스개신교 신학부가 프라하에 설립되어 있다가 지난 2000년대에 이르면서, 먼저 설립된 개신교 후스신학부와 합병하여 개신교 신학부로 명칭변경을 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학부에서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은 강의되고 있다. 또한 코메니우스의 역사적인 유산의 보호와 발전을 위하여 그의 고향인 우헤르스키-브로드(Uhersky-Brod)에는 코메니우스 기념박물관이 설립되어 그의 교육과 신학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슬로바키아공화국의 수도인 브라티스라바(Bratislava)에는 1919년에 설립된 종합대학인 ‘국립코메니우스대학’이 있다. 공산권 통치기간에 이 대학의 이름을 ‘레닌대학’으로 개명하였으나, 코메니우스의 학문을 이해한 공산당은 다시 코메니우스이름 사용을 허락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영향은 오늘날 유엔 산하에 있는 ‘유네스코’(UNESCO)라는 국제기구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기구는 세계적인 전 인류의 교육과 과학과 문화의 유산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코메니우스의 정신을 토대로 하여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모든 결과들은 여전히 오늘날도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정신의 유산이 어떻게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귀중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결론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 사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헤미아-모리비아형제연합교회의 긴 역사를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의 근본정신이 그가 속했던 보헤미아-모라비의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의 확인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진리를 사랑하는 것, 그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던 그 선조들의 개혁신앙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아 실천하였던 그것이었다. 그러한 진리에 대한 확신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정치적인 위협상황과 개인 실존의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굴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인내와 섭리에 응답하며, 전 인류를 향한 신적 계시의 증언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그 근본 토대가 형제연합교회 신앙의 영향을 본받고 있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 인류의 구원과 함께 창조세계 전체의 구원을 꿈꾸고 있는 그의 신적 계시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는 오늘 이 시대의 현대신학적인 통찰을 능가하고 있는 모습이며, 특히 범지혜의 계시철학에 근거하여 전 세계인의 전인구원과 전인교육을 제창한 그의 교육신학적인 통찰은 우리 모두 배워야 학문적인 통찰임에 분명하다. 또한 창조세계 전체를 꿰뚫고 있는 그의 신학적인 통찰은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를 그리스도의 통치실현의 현장으로 바꾸어야 하는 세계개혁의 통찰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모든 것들은 바로 보헤미아-모라비아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정신에 근거하면서, 벌써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 넘고 있는 코메니우스의 탁월한 사고능력의 발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사상은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며,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정일웅 교수
독일 본(Bonn)대학과 부퍼탈(Wuppertal)신학원에서 공부하였고, 본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1984년 이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여 실천신학 분야에서 기독교교육학과 예배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총신대 여러 보직과 더불어 신학대학원장,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www.comenius.or.kr) 소장으로 있다.

저서 : 종교개혁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 교육목회학, 교회교육학, 한국교회와 실천신학, 개혁교회의 예배와 예전학, 섬김의 신학, 서계평신도 신앙인물사, 성경해석과 성경교수학,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해설, 독일교회를 통해 배우는 한국교회의 통일노력,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
역서 : 우리시대의 하나님 나라, 기독교 신앙의 초석, 독일 개신교 신학연구 개론,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 코메니우스의 발자취, 미래를 가진 하나님의 나라


48) Bic,Milos, Ebenda, 63-64.
49) Comenius,J.A.,Vermaechtnis der sterbenden Mutter der Brueder-Unitaet 1650 :in Bic Miols, ebenda, 93.
50) Ebenda, 96.
51) Ebenda, 83,88.
52) Bic, Milos, Ebenda, 64.
53) Ebenda, 64.
54) Ebenda, 65.
55) Ebenda, 69.
56) Ebenda, 69.
57) 코메니우스가 남겼던 미완성 대작인 7권으로 구성된 “인간사물의 관계개선에 대한 포괄적인 제언”(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atholica consultatio)이란 문서가 헤르만 프랑케가 세웠던 할레의 도서관에서 취체브스키에 의하여 1935년에 발견된 것은 그 사실을 입증해 주는 근거라 할 것이다.
58) Ebenda, 70-71.
59) 코메니우스가 목사로 안수 받아 처음 목회하게 된 지역이 풀넥(Fulneck)이었고, 그 교회구성원들은 대부분 독일계 모라비아인 들로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마을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독일에서 공부한 덕분으로 독일어설교가 가능하여, 그곳 교회를 돌보았던 것이다.
60) Ebenda, 72.
61) Ebenda,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