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기고

[칼럼] 재난 가운데 있는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자세

국내에서는 다시금 확진자가 늘어가고 있고,
예의 주시하는 정부 당국은 다시금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가야만 하나 고심하고 있다.
각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교민들은 속속 귀국하고 있으며,
일반 항공기의 운항이 멈춘 나라에서는 전세기를 통해서라도
귀국하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온 세상은 짙은 먹장구름에 덮여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상대로라면 곧 구름은 걷혀야 하거늘 4개월이 지나도 걷히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다시금 확진자가 늘어가고 있고, 예의 주시하는 정부 당국은 다시금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가야만 하나 고심하고 있다. 각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교민들은 속속 귀국하고 있으며, 일반항공기의 운항이 멈춘 나라에서는 전세기를 통해서라도 귀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너 나 할 것 없이 고국으로 돌아가니 함께 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께서 보내신 그 땅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재난의 날들을 함께 할 것인가? 고민이 깊어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재난의 상황에서 철수여부에 대한 결정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선교사 개인에게 있는가? 선교본부에 있는가? 아니면 주파송교회나 후원교회에 있는가? 이 또한 명확한 선을 긋기가 어렵다.

며칠 전, N 국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는 한국교민들의 수가 어느 정도 기대에 미치게 되자 전세기가 떴고, 기다리고 있었던 교민들과 가족들이 귀국하였다. 이들 가운데에는 몇몇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고 선교지에 남아 있는 선교사들이 더 많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대부분의 선교지는 의료적으로 열악한 환경인데, 만일에 하나 감염이 되기라도 한다면, 신속히 치료할 수준의 병원은 있는 것인가? 고민이 깊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연관하여 필자가 선교지에서 겪은 여러 자연 재난 중에 “철수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함께 동역했던 여러 선교사들과 치열하게 고민했던 때가 기억난다. 지난 2015년 4월 25일이었다. 정오를 5분 남겨놓고 네팔 중동부의 건더끼 현(구 고르카 현)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그 강도의 규모는 실로 대단하여 모멘트 규모 7.8의 대지진이었다. 그리고 여진들이 계속되었는데 그 다음 날인 4월 26일 규모 6.8의 여진이 땅을 흔들었으며, 계속 크고 작은 여진이 오던 중, 5월 12일에 규모 7.4의 본진에 가까운 여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네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8,4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지진으로 인해 네팔의 학교 교실들이 붕괴되고 균열이 가서 20만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공부할 교실을 잃었다. 선교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 카트만두에도 막심한 피해가 있었다.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과 같은 여러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파괴되었다. 에베레스트산에서도 눈사태가 발생해 2014년 에베레스트 눈사태 이후 최대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진 당일 한국 교민 1명이 부상을 입었고 4월 26일에는 한국인 부상자 2명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직접적인 상해보다 심각한 상황은 정신적, 심리적 고통이었다. 한국 선교사들 중에서도 공황장애로 인해 음식 섭취가 어려워, 하루하루 생활을 힘겨워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계속 이어지는 여진으로 인해 한밤중에도 놀라고 잠이 깨고 여러 번 밖으로 뛰어나가다 보니 어린 자녀들이 있는 선교사 가정들은 아예 집 밖 공터에 텐트를 치고 한 달이 넘는 날들을 야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에 몬순 우기철이 빨리 시작되어 쏟아지는 빗물이 텐트 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이 놀라서 일어나게 되었고, 이와 같은 그날 밤의 비 오는 어려운 상황은 한국선교사 공동 카톡방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놀람과 충격, 이어진 불안과 슬픔,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선교사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함께 멍에를 메었다. 같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이 서로 간에 가슴으로 통하는 격려요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황이 익숙해졌을 때에 선교사들은 재난대책본부를 세우고 한국교회와 후원자들이 보내온 재난구호금으로 생필품을 사서 지진피해가 심한 곳으로부터, 그리고 카트만두의 집을 잃은 현지인들에게까지 구호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구호활동은 처음에는 선교사들과 연관된 현지교회 성도들 중에 피해를 입은 교우들을 대상으로 또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의 가정, 그리고 고아원과 같은 곳에 지원하였으나 점차 구호 범위는 선교사들과 연관이 없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전 세계에서 네팔을 위해 구호품을 보냈지만, 유난히 행정 처리 속도가 느린 네팔 정부여서 직접적으로 이재민들에게 도움이 가게 된 것은 6개월이 지나서였으니,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발 빠르게 움직여 구호사역을 실천하는 한국 선교사들은 저들에게 천사나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의 박애정신이 정오의 빛처럼 뜨겁게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가장 어려울 때에 선교사들은 상처를 입은 치유자요, 이웃이요, 친구였다.

네팔에 상주했던 다국적 정부단체나 외국구호개발 단체들, 외국인 선교사들이 임시로 철수를 결정하고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선교사들은 한국과 외국의 선교전략이 다르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저들과는 다른 신분, 다른 위치에 있구나!”

물론, 한국 선교사를 선교지로 파송한 고국교회나 후원교회, 선교단체는 저들의 안부를 묻고, 염려하고, 또 구호금을 보내주고, 기도해주는 등 저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고를 다해주었다. 그러나 어느 교회도 “이제 그만하면 됐다. 들어오라! 철수해라!” 이런 말을 전해주지는 않았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들만이 사랑하는 아들이, 딸이, 동생이, 형님이, 누님이, 그 재난을 피해 들어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왕정 간에 권력 쟁취를 위한 내전의 정점에서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 최고조에 달했었던 2006년 봄, 외국인이 거의 다 떠난 카트만두의 텅 빈 히말라야 호텔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수련회를 가졌다. 강사로 오신 두 분 목사님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여러분은 선교사입니다. 선교지에서 생명을 드리십시오.” 그때에 선교사들은 다시 한번 선교사의 본분과 신분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 우리가 죽으러 왔지!” 큰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고 요동함이 없는 확고한 명제였다.

대지진 발생 이후, 소식을 접한 필자의 누님으로부터 문자로 연락이 왔었다. “빨리 한국으로 오면 좋겠다 싶지만, 현지인들과 고통도 함께 나눠야 진실한 목자겠지?” 누님의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나와 피를 나눈 혈육지간에도 선교사는 다른 존재이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어려움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고, 정신력으로 버티며, 5개월간 구호사역을 했었던 필자의 아내는 공황장애로 인해 한국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다시금 카트만두로 들어오는 비행기에서 트랩을 내려오다가 호흡곤란 증세로 정신을 잃었다. 공항 의료진에 의해서 응급치료를 받고, 세 시간이 지나서야 수면제에 의해 잠든 채 휠체어에 실려 나오는 아내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회복되기까지는 2년이 넘게 걸렸다. 누구를 원망할 수 있단 말인가? 회복된 것이 감사할 뿐이다.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면서 누구나 마음에 가지는 생각은 동일할 것이다. “나는 이제 선교사다. 복음을 들고 그 복음 전하기 위해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떠나, 머나먼 타국 땅,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한 저곳으로 주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생명도 각오하고 들어간다.”

선배 선교사이자 선교신학자였던 허버트 케인은 이런 말을 했다. “19세기의 선교는 선교사에게 생명을 요구했고 선교사는 생명을 바쳤다. 거기에서 복음의 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20세기의 선교는 인내를 요구하고 있다. 선교사는 19세기의 선교사만큼 이에 버금가는 헌신이 필요한데 그것은 인내하는 것이다.”

순교는 내가 원하기 보다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 위대한 선교사 바울의 반열에 서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의 상황은 다르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견디는 것이 오늘날 이 시대의 선교사의 모습이며, 그로 인해 복음의 열매를 걷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버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인내는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순교자의 모습으로 단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견딜 것인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현지인들과 함께 거할 것인가? 그렇게 명제를 정해놓고, 그 다음 지혜를 얻기 위해 절실한 기도와 확고한 결단이 필요하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세상에 안전지대가 없는 상황에서, 의료시설이 더 열악한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당하는 어려움과 선교사가 지어야 할 십자가와 멍에에 대해 선교사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는 변함이 없다. 고국교회로부터 “이제 그만 됐다. 들어와라”라는 말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해서도 안 된다. 당연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일찍이 순교자의 터전 위에 세워졌으며, 그 교회에서 자라나고 믿음이 자라나, 헌신을 각오한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파송할 때마다 보내는 교회는 “선교지에서 뼈를 묻어라.”는 권고의 말과 함께 파송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19의 발원지가 되었던 중국 우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지만 병원시설이 부족하여 여러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한국 정부는 비행기를 보내어 교민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그 때에도 귀국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한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3일간의 금식기도회에 참여하고 그 어려운 때를 선교지 형제사랑의 마음으로 일관하며 극복해 나갔다. 정말 가슴이 뭉클 뭉클한 이야기이다. 그중에 한 한국 선교사는 현지에 남아 있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훈련 중에 있는 리더들과 가르치고 있는 지체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세워진 리더들에게 사명자는 사명을 따라 움직이고 상황을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세워가는 일은 언어로 다 담아낼 수가 없기에 이때 이런 작은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이 감염의심 환자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에 남기로 결정하자 생각지도 못했던 현지 지체들의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이들을 보살펴 왔는데, 지금은 반대로 현지 지체들이 저희를 돕고 챙기고 있습니다. 위기 상황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사랑과 전우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지금도 선교 현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교사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일 것이다. 함께 어려운 때를 겪으면서 형성되어지는 그 형제애의 관계는 돈으로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네팔에서 대지진 당시 현지인들과 함께 있었던 필자의 경험도 동일했다. 그렇다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선교지 현장에서 “오늘도 죽으면 죽으리라.”의 정신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어떠한 자세로 견뎌야 할 것인가?

그것은 전쟁에서의 대처 방법과 다를 바가 없다. 최선을 다해 무장을 하고 전투에 임해야 한다.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코로나 19의 상황에서는 최고의 무장이란 예방과 방역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예방은 철저히, 마음은 담대하게!”, “예방은 철저히, 예배는 더 철저히!” “예방은 철저히, 기도는 더 뜨겁게!”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지난 4개월간 예배 시간마다 외쳐온 구호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실천해가고 있다. 온라인을 통한 예배와 더불어 교회당에서 한 번도 공예배를 쉰 적이 없다.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예방과 방역을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본연의 임무를 쉴 수는 없다.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촌각에 생명을 다투는 전투의 현장이 그러할 것이다.

만일 그러다가 하나라도 감염이 되는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다친 사람은 후송하고, 여전히 싸울만한 병사는 전투 현장에 남는 것이다. 그리고 본부에서는 인적, 물적 필요를 공급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다친 사람은 치료를 받고 나으면 다시 전투에 임하는 것이다. 이 전쟁은 단기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마틴 루터는 유럽을 휩쓴 흑사병에 적극 맞설 것을 주문했다. 1517년, 이 전염병은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크를 비롯한 주위 도시에 나타났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도피해야 하는가?”라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소명을 받은 자는 전염병에 다가가라”고 외쳤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회자는 죽음을 두려워 말고, 병든 자를 위로하며, 성례를 집행해야 하고, 시장과 법관, 의사와 경찰은 자리를 지켜 도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반 시민도 예외는 아니라 말하면서, 부모라면 흔들림 없이 자녀를 돌볼 소명이 있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장에서 고난을 겪은 또 한 믿음의 선배가 있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마틴 루터와 더불어 양대 산맥으로 일컫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모습에서도 전염병속에서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주의 종들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1519년 8월에서 1520년 2월 사이에 스위스 취리히의 인구 1/4 이상이 흑사병으로 죽는 일이 일어났다. 부유한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를 떠났다. 당시 과로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진 츠빙글리는 180㎞ 떨어진 한 온천 휴양지에서 요양 중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소식을 들은 츠빙글리는 급히 취리히로 돌아가 환자를 돌보던 중 흑사병에 감염되었다. 목숨이 위태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앞둔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했다. 그는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다. 이때 병중에서 그가 쓴 쓴 기도시 ‘역병가’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주 뜻대로 하소서. 저는 부족함 없사오니, 회복되든 멸망하든 저는 주의 그릇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 이후로 죄의 영향력은 자연계에도 미쳤다. 에덴동산에 없었던 자연적 재앙이 일어났다. 지진과 해일과 화산폭발과 폭염과 기근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였다. 또한 죄의 결과로 생로병사의 유한한 인생으로 살던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과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감염되고 그 결과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에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셨다. 그 상황 속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제자들과 동고동락 하셨다. 병든 자들이 늘 곁에 있었고, 귀신 들린 자들, 유리하는 양과 같은 저들 곁에 계셔서 가르치시고 전하시고 고치셨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인생이 곤고하고 삶에 지친 저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어려운 자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목양사역을 하는 목사나, 전도사역을 하는 선교사의 위치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한 재난은 세상 어느 나라도 예외가 없으므로 최고의 피난처는 없다. 철저한 예방은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다. 그럼에도 만일에 하나 코로나에 감염이 된다면, 현지에서 가장 유수한 의료진과 의술이 있는 병원을 찾고, 또는 가능하다면, 현지 KOICA 소속 의료진의 도움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고국교회에도 알리고 성도들의 간절한 물질과 기도지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견딤과 인내로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이 시대의 선교라 한다면, 선교사는 약진과 후퇴, 회복과 충전, 그리고 응축된 힘으로 다시금 전진해 나가는 것이 이 시대의 재난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선교사의 모습일 것이다.

김연정 목사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미국 Calvin 신학대학원 (Th.M.)
미국 Asbury 신학대학원 (D.Min.)
필리핀에서 산지족 선교와 네팔에서 신학교와 기독교학교 설립 및 운영으로 24년간 사역을 감당하고 2016년에 귀국하여 담임목사로 산돌중앙교회를 섬기고 있다.